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번역 임현영
한옥희의 16mm 필름 <무제 77-A Untitled 77-A>(1977)는 한 젊은 여성이 필름 영사기 옆에 앉아 셀룰로이드 필름 조각들을 손에 쥐고 단호하게 잘라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컷(cut)’은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만나는 방식인 동시에 그것은 온전한 하나의 필름을 파괴하거나, 이를 상영 불가능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녀의 행동은 창조일까, 아니면 파괴일까? 6분 간의 영화가 끝날 무렵, 그 해답이 드러난다. 태동하는 페미니즘 실천에 있어 창조와 파괴는 불가분의 관계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옥희는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실험영화 그룹인 ‘카이두 클럽(Kaidu Club)’의 창립 멤버였다. 그곳에서 그는 문학을 공부했다. 큐레이터 김지하의 설명에 따르면 “‘카이두’는 영화 산업에 저항하는 딸들의 이름”이으로, 이는 쿠툴룬(Khutulun)이라는 이름의 전사(warrior) 딸을 두었던 칭기즈 칸의 증손자 이름을 빌린 것이다.1 한국 최초의 여성 실험영화 집단인 카이두 클럽은 독립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영화제와 심포지엄을 조직하면서 주류 영화의 강한 상업주의과 가부장적 경향에 명확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Untitled 77-A는 이러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기존 산업적·재현적 규범을 거부하며, 당시–그리고 안타깝게도 많은 면에서 여전히–전통적으로 남성의 것으로 여겨졌던 영화제작자의 역할을 여성 자신의 것으로 선언하는 모습을 실험적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는 큰 가위가 중심적인 사물로 나오는데, 이는 그것이 실용적 용도로 쓰이는 편집용 테이블 위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작품 전체에 걸쳐 가위는 영화 제작 과정 전반에 대한 환유적 기표(metonymic signifier)로 등장하며, 현실을 모방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시간, 의미의 구성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잠재력을 환기시킨다. 주인공이 거리에서 촬영하는 모습을 담은 일관된 금색 톤의 이미지들에 이어, 가위의 클로즈업이 급격히 폭발하듯 일상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역동적인 몽타주에 구두점을 찍는다. 가위는 스카이라인을 빠르게 패닝하는 화면 위에 이중인화(superimpose)되는데, 이는 영화 제작이 도시와의 자율적인 관계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수단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찰과 더불어, 가위는 동시에 강렬한 폭력의 도구, 기존 질서에 대한 페미니즘적 거부의 상징으로 부상한다. 주인공이 필름 조각을 잘라낼 때, 그녀는 마치 그것을 손상시키려는 듯 무심하고도 파괴적인 쾌감으로 작업을 수행한다. 여성 누드 조각상들이 채워진 야외 공간을 핸드헬드로 빠르게 훑고 지나간 후—이는 지배적인 재현 방식이 여성을 도식적인 유형, 즉 인간 이하의 사물로 축소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이다—가위는 공중에서 여러 번 격렬하게 허공을 가르다 일련의 빈 화면(blank screen)으로 이어진다. 이는 모든 것이 영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성상파괴적 신념을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적 전형이다. 이후 주인공은 필름스트립을 반복적으로 잘라내고, 컷이 바뀔 때마다 찰흙으로 거칠게 빚어진 신체 부위들이 전체로부터 방금 떨어져 나온 것처럼 툭툭 굴러떨어지는 클로즈업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의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이 시퀀스는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의 상징성을 강하게 호출한다. 그 도구는 남근적 권력(phallic potency)의 전유와 거세의 위협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는 가위가 무기처럼 사용되어 빈 화면을 연상시키는 흰색 표면에 찔려 들어가며 상처를 내는 순간이다. 그 상처에서는 피처럼 보이는 진홍색 페인트가 과도할만큼 쏟아져나온다.
<무제 77-A>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감독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감독과 편집자 엘리자베타 스빌로바(Yelizaveta Svilova)가 함께 만든 <카메라를 든 사나이 Man with a Movie Camera>(1929)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모두 몽타주의 분석적·종합적 기능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유희적으로 탐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충동과 더불어, 한옥희의 영화는 분명하게 젠더화된 분노와 욕망이 뚜렷하게 구현하며, 세계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영화적 행위를 페미니스트적 신념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카메라를 든 여성은 대중 영화가 반복해온 깜박이는 허구를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미지를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쾌하게 긍정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한옥희는 자신과 동일시되는 주인공과 함께 화면에 등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컷!”이라고 외친 뒤, 가위를 들어 카메라이자 관객을 향해 찌르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이미지는 움직이는 영상(moving image)이 지닌 표현 가능성에 대한 짜릿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한편, 그에 담긴 마지막 제스처는 동시에 제4의 벽(the fourth wall)을 부수며 관객의 시선을 정면으로 되받아친다. 그간 영화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적대적이었고, 여성을 배제해왔으며, 여성들이 자기 삶과 생각, 감정을 스스로 영상으로 표현할 기회를 부정해왔다. 하지만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자신의 첫 글(1970년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 대회 반대 시위에 대한 첫 비평문으로 마르가리타 히메네즈와 공동 집필, Shrew 지에 게재)에서 말했듯, “스펙터클은 취약하다.”2 그것을 자르고, 산산조각 내고, 뒤집고, 카메라를 들어, 스크린을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 우상파괴와 우상숭배의 욕망이 공존하는 <무제 77-A>는 바로 이 과제를 수행한다. 이 영화는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많은 여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 투쟁의 장이자,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넘어 세계를 재창조하는 방법이었다.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 』는 <무제 77-A>와 같은 영화와 비디오 작품들—즉,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에 대해 다룬 무빙 이미지 작업들—에 바치는 헌사이다.3 책이 다루는 작품들은 상업적 규범에 맞서 만들어졌으며, 젠더화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는 페미니즘 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시각 매체가 지배와 해방 모두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오래전부터 인식해온 해당 운동의 연장선에서 기획되었다. 또 조직된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작품들도 있으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기지 않지만 그 영화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다양한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제작된다. 이러한 실천들은 대개 영화 산업과는 매우 다른 제작 방식을 취한다. 이들은 191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 영화 스크린을 사실상 독점해 왔고, 오늘날까지도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 자본집약적 형태인 장편 극영화(feature-length fiction film)의 패권과 결별한다. 물론 극영화 제작이 페미니즘 개입의 핵심 현장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그 영역을 넘어 주변부를 중심부로 삼는다. 여성들이 가장 많이 활동해 왔고, 영화 제도의 모든 측면을 반대의 관점에서 저항적으로 재구성해온 영역에 주목하는 것이다. 책은 적극적 참여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영화사를 포함한 기존의 영화사에서 빈번히 소외되었던 무빙 이미지의 실천 영역에 주목한다. 이는 바로 “논픽션(nonfiction)”이라는 불완전하지만 실용적인 범주로 묶일 수 있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비디오의 교차하고 분기하는 전통들이다.4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행동주의 비디오 테이프에서 전위적 실험, 에세이 필름에서 다큐픽션, 개인적 증언에서 관찰 다큐멘터리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하나의 톤이나 스타일, 접근 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날것처럼 직접적이고, 시적으로 비유적이며, 기쁨에 차 있으면서도 처절하고, 친밀하면서도 확장적이다. 일부 작품은 벨 훅스가 “백인 우월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부른 체제 아래 살아가는 고통을 조망하고, 다른 작품들은 그 체제 밖에서 존재하는 해방의 방식들을 상상한다.5 많은 작품이 여성성의 힘을 기리고, 공동체적 유대를 찬미한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는 여성들의 삶을 그 구체성과 다양성 속에서 담아낸다.
영화 산업 내에서 지속적인 경력을 쌓은 소수의 여성 감독들—그것이 상업적 주류이든, 더 자주 그렇듯 국제 예술 영화계이든—은 비평적·학문적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 영화·비디오 작가들은 장편 극영화를 만들 기회가 없었거나, 혹은 만들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없었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아주 많이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6 로빈 로리(Robin Laurie)와 마고 내시(Margot Nash)의 <만족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We Aim to Please>(1976)처럼, 어떤 이들은 주류에 도무지 흡수될 수 없는 급진적 시각을 창조하는 데 몰두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탈리아 여성 집단이 만든 <강간 재판 A Trial for Rape>(1979)처럼 협업을 통해 법체계에 내재한 가부장적 폭력을 기록했다. 마르타 로드리게스(Marta Rodriguez)와 호르헤 실바(Jorge Silva)의 <사랑, 여성, 그리고 꽃 Amor, mujeres y flores>(1984-89)처럼 젠더 문제를 계급, 생태, 신식민주의 문제와 연결하기도 했다. 아씨아 제바르(Assia Djebar), 포루그 파로흐자드(Forough Farrokhzad), 츄 먀오진(Qiu Miaojin)처럼 본래는 문학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영화는 단 한두 편만 만든 경우도 있다. 혹은 사라 말도로르(Sarah Maldoror)처럼 아카이브에 실현되지 못한 수많은 프로젝트 계획들만 가득 남겨진 이들도 있다.
소수의 잘 알려진 극영화 감독들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영화 제작의 거대한 영역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채, 기존의 위계와 권위를 되풀이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작가주의(auteurism)는 방대한 작업물에서 개인적 스타일을 식별하는 데 기반을 두며, 감독을 선구적 “거장”으로 신격화하는 개념과 함께, 여성 영화사에서 결정적인 기여들을 오히려 간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해왔다. 1972년, 여성 영화 비평지 「여성과 영화 Women & Film」의 창간사에서 시우화 베(Siew-Hwa Beh)와 소니 세일리어(Saunie Salyer)는 작가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을 “시급한 문제”로 지적한다. 그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작가주의 이론에 여성이 동등한 수로 포함된다 해도, 그것이 영화 제작을 마치 일인극처럼 연출하며 감독을 슈퍼스타로 만드는 억압적 이론임에는 변함이 없다.”7 베와 세일리어는 영화 평가 방식에 대한 대안적 틀뿐만 아니라, 그들이 시스템 영화(system cinema)라고 부르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제작 형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고 유통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정치적 맥락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그들의 창간사는 다음과 같은 연대의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노동자, 흑인, 제3세계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의 해방을 지지하며, 그들이 또한 우리의 해방을 지지해주기를 바란다.”8
비록 「여성과 영화」는 단 3년 동안 5호만 발행되고 짧게 끝났지만, 그 존재는 과거 페미니즘 영화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포괄적이고 전복적인 비전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이 시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필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정신분석가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이 “가장 긴 혁명”이라 불렀던 그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9 페미니즘 영화 비평은 단지 소수 여성들이 배타적인 시스템 안에 포함되는 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성평등을 기업 이사회 내의 적절한 대표성(adequate representation)으로 환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한계에 머문다. 이 책은 베를린 하우스 데어 쿨투렌 데어 벨트(Haus der Kulturen der Welt)에서 열린 전시 및 상영 프로그램 《주인 없는 영토: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No Master Territories: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2022)(이하 ‘주인 없는 영토’)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이런 문제의식을 인식하고 영화 산업의 그림자 속에서, 때로는 그 산업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번성해온 실천들에 주목해온 학술적, 큐레토리얼적 전통을 계승한다.10
이 책은 단순히 전시에 포함된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기록한 도록이 아니라, 전시의 동반 독본이자 독립적인 선집(anthology)으로 기획되었다. 책은 전시가 다루는 연구 영역을 개괄하고 그 안의 실천들에 맥락과 고찰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 너머로 논의의 지평을 확장한다. 1972년 베와 세일리어가 직면했던 것과 유사한 긴급한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 시점에서, 이 책은 세계적 지형 속에서 주요 인물, 맥락, 논쟁을 재조명하며, 여성에 의한, 여성에 관한 논픽션 영화와 비디오 작업들을 교차적이고 다성적으로 분석한다. 물론 이것이 결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결된 기록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 책은 1970~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여성 해방 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에 주로 초점을 맞추며, 세대 간 기억을 복원하려는 집단적 행위로서 과거의 결핍을 보완하고 가능성 있는 역사들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회고적 접근은 과거의 중요한 작업들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긴급한 과제들에 응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표성의 정치, 문화 생산에서의 정체성의 위치, 다큐멘터리와 실험적 실천의 혼성화, 정전(canon)의 미래에 관한 오늘날의 활발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질문들이다. 과거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으며, 현재의 빛 아래 비추어질 때, 잠재되어 있던 역사들이 새롭게 가시화될 수 있다.
이 책이 이처럼 다채로운 구성을 취하게 된 동기는 결코 억압이라는 공통 경험에 기반하여 여성을 단일하고 통합된 집합적 주체로 설정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인종, 계급, 지역의 불평등을 흐릿하게 만들고, 장애혐오와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하며, 연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어렵지만 필수적인 실천을 부정하는 본질주의적 신화를 반복할 뿐이다.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조직가인 롤라 올라페미(Lola Olufemi)의 말처럼, “여성이라는 말은 전략적 연대이며, 우리가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하는 우산이다. 이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자신을 다르게 정체화했을 이들을 위해 동원될 수 있다. 해방된 미래에는 이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11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는 “여성”이라는 개념 안에 숨어 있는 허위 보편주의를 회피하고자 하며, 그 대신 젠더의 조건성과 억압의 동시성,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을 강조한다. 동시에, “여성적 시선(female gaze)”이나 “여성적 미학(feminine aesthetic)”이라는 식으로 특정한 형식적 특성을 코드화하려는 개념도 거부한다. 이와 같은 공통된 시각 언어를 시대를 초월한 패러다임, 혹은 일종의 영화 장르로 간주하는 관점은 필연적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여성이 일정한 본질적 특성을 공유하며, 그 특성이 일관된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위험한 발상에 근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지식인이자 작가인 실비아 보벤셴(Silvia Bovenschen)은 1976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미니스트 예술’에 대한 형식적 기준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첫째, 예술의 규범이라는 개념 자체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게 되며, 둘째, 페미니즘적 ‘접근’이라는 이름 아래 경직된 미학 논쟁을 재현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12 책은 페미니즘 실천을 단순히 남성 시선에 대한 부정이나, 타고난 자매애에 대한 본질주의적 환상에 가두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에 대해 말하는 논픽션 영화와 비디오의 이질성과 다성성을 기념하며,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실천의 정신으로 삼는다. “차이는 단지 용인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창조성이 변증법처럼 튀어오를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 대극(對極)의 자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13
이 책의 계기가 된 전시의 제목 “주인 없는 영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카이브적 귀환을 의미한다. 이는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의 1991년 에세이집 『달이 붉게 차오를 때: 재현, 젠더, 문화정치 When the Moon Waxes Red: Representation, Gender and Cultural Politics』에 수록된 장의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폐지론적 선언은 깊이 유토피아적이며, 젠더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형태의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한 대담한 세계 재구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단일 이슈로 환원될 수 없는 페미니즘의 의제를 지시하는 이 구절은,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을 짊어진 지리적 이미지를 통해, 전체주의적 통제와 소유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물질적·인식론적 상태를 상상한다. 이는 거장 중심의 예술 작품, 즉 “걸작(masterpiece)”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그에 수반되는 낭만적인 창작 주체 개념을 거부한다. 이 표현은 학제 간의 교차와 수분을 강조하며, 굳어버린 계보를 깨뜨릴 것을 요구한다. 제국주의적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의 분할을 해체함으로써, 위계 없는 횡단적이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연결이 가능한 유동적 공간을 연다.
‘주인 없는 영토’로 이루어진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상(像)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요구는 추진력과 생성적인 힘을 가지며, 억압적인 규범들로부터의 이탈을 드러내고, 근본적인 재구성에 대한 꿈을 불러일으킨다. 철학자 아미아 스리니바산(Amia Srinivasan)은 페미니즘을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시키려는 정치운동”으로 정의하면서 이와 유사한 전망을 제시한다. 즉, 페미니즘은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들과 관계들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목표로 하지 않는 미래지향적 실천이라는 것이다.14 영화 및 미디어 연구에서 ‘세계 만들기(worldmaking)’라는 개념은 종종 미디어 결과물이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현실과 괴리된 특성을 지닌 세계일수록, 관객은 그 속에서 믿음을 부여하며 감각을 동원하게 된다.15 그러나 스리니바산에게 있어 세계 만들기는 “우리의 재현적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세계를 변형하는 것”을 뜻한다.16 이 개념은 폐쇄적인 디에제시스(diegesis)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헤게모니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방식으로 현실을 다시 기술하고, 그 시선이 다수에게 공유될 때 발생하는 변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세계를 새로 만드는 시도란 곧 현 상태를 거부하고, 기존의 이해 틀을 전복하며, 새로운 것의 출현을 열망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논픽션 영화 및 비디오 실천들을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의 제스처로 개념화함으로써, 스리니바산의 용어 정의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무빙 이미지가 해방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세계 현실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실천들은 단순히 폭력과 차별을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격자 자체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리하여 익숙한 것이 페미니즘적 분석의 빛을 통해 새롭게,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한다. 스리니바산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의 시도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새롭게 제안된 현실의 재묘사(redescription)는 지배적인 재현 방식과 경쟁해야 하며, 그 재묘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자리를 잡을 경우에 이해관계가 침해될 당사자들에 의해서도 수용되어야만 한다.”17 그는 또한 “재현적 개입이 자동적으로 세계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전망”에 대한 경계를 촉구한다.18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마감 기한은 존재하는가?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말하기 위해, 새로운 재기술은 어느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수십 년 전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영화와 비디오 속 재묘사들은 여전히 수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은 창작의 순간을 넘어서 흐르고 있으며, 미래의 관객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차이를 요구하는 뜨거운 열망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영감을 주고, 인식을 고양하며, 실제이든 상상이든 공동체를 만들어내며 시대를 관통해 나아간다. 오늘날 다시 이 작업들을 돌아볼 때, 우리는 지배적 재현 질서 안에서 분명히 변화한 부분들과 여전히 정체된 채 남아 있는 문제적 요소들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다. 이 세계 만들기의 시도들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채,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형태의 도래를 요구하고 있다. 그 형태 중 일부는 어쩌면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전면적 변혁의 꿈을 반복해서 되새기는 일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최근 몇 년간 주류 문화와 정치 전반에서 페미니즘이 부활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이론가 클레어 해밍스(Clare Hemmings)가 말했듯, “페미니즘의 종말만큼 꾸준히 발표되는것도 없지만” 그 반복된 죽음 선언은, 사실상 페미니즘이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며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19 (이 점에서 페미니즘과 영화는 닮아 있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포괄적이고 모호한 용어가 되었으며, 신자유주의, 신식민주의, 인종차별, 트랜스포비아와 결탁하는 입장들마저 포섭 가능한 유연한 이름표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즈 베르제스(Françoise Vergès)는 그녀의 책 『탈식민 페미니즘 A Decolonial Feminism』 서두에서 중요한 고백을 한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항상 쉽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 페미니즘의 배신 자체가 그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녀는 질문한다. “이 용어들이 너무나 오염되어 극우조차도 그것을 전유할 수 있게 된 지금, 왜 굳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고, 왜 페미니즘을 옹호해야 하는가?”20 베르제스는 과거와 현재에 있어 페미니즘이 무고하지 않았음을 결정적으로 강조한다. 백인 우월주의와의 공모, "근대화(modernization)”와 여성 인권이라는 명목하에 지배를 영속화하는 가짜 "문명화 임무(civilizing mission)" 속에서의 지속적인 역할, 이슬람 혐오와의 유사성, 교도소 국가(carceral state)와의 밀착, 그리고 다른 형태의 특권을 부정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젠더 억압을 이용하는 행태 등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와 캐서린 로튼버그(Catherine Rottenberg)와 같은 연구자들은 페미니즘의 일부 흐름이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지 설명해왔다. 한때 집단적 해방에 전념했던 운동이 사회 정의라는 이상에서 멀어져 행복, 일과 삶의 균형, 개인적 성취, 자기실현과 같은 가치로 이동하면서 어떻게 무력화되었는지 보여준 것이다.21 이미 1993년 페이퍼 타이거 텔레비전(Paper Tiger Television)은 그들의 재치 있고 예리한 비디오 작품 <시스터후드™: 여성 시장 띄우기 Sisterhood™: Hyping the Female Market>에서, 오늘날 ‘린-인(lean-in)’ 페미니즘으로 알려진 흐름이 어떻게 빈곤층 여성, 이주 여성, 인종화된 여성들을 착취하고 정당화하는지를 지적했다.22 이 여성들은 값싼 소비재 생산 노동자이거나, 돌봄과 청소 노동을 수행한다. 이들의 과도한 노동이야말로 특권층 여성들의 자기계발과 성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는 가려진다. 프레이저, 친치아 아루짜(Cinzia Arruzza),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는 오늘날 도처에 널린 이러한 재현 중심적 태도를 “기회균등을 위한 지배(equal opportunity domination)”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태도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드론을 날려 부모를 살해하며, 국경에서 아이를 감금하는 사람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요구하는 것.”23
이러한 현실을 성찰하며, 베르제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만약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가 자본과 국가, 제국의 도구가 되었다면, 우리는 사회 정의, 존엄, 존중, 삶의 정치라는 목표들로 페미니즘 운동을 재활성화함으로써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는 “광범위하고 초국적이며 다원적이고 탈식민적인 정치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재등장”, 다른 하나는 “문명화 페미니즘(civilizational feminism)에 의한 여성 투쟁의 포섭” 때문이다.24 이처럼 베르제스는 페미니즘이 비해방적 세력들에 의해 전유되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페미니즘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비서구권(Global South)에서의 오랜 여성 투쟁의 역사와, 최근 등장한 여성주의 연대체들—예컨대 2016년 이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여성 파업들 (폴란드에서 10만 명 이상의 여성이 낙태 금지에 항의해 거리로 나섰던 운동이 그 예이다)에 영감을 받아, 재구성된 페미니즘 프로젝트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역설한다. 이 책 역시 이러한 입장에 기초한다.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현재의 교착 상태를 우회하는 다중의 계보들을 따라가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의 다른 가능성들을 추적해간다.
영화학자 실리 워런(Shilyh Warre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다큐멘터리의 민족지학적 충동―타자와 마주하고, 타자를 알기를 욕망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탐색하게 되는―은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수많은 여성 감독들의 작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왔다.”25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이러한 성향을 점검하며, 여성 감독들이 민족지학이 타자성(alterity)을 생산하는 데 지속적으로 작동해온 역할과, 그 중심에 자리한 권력, 시선, 지식의 삼각 구조에 어떻게 반응해왔는지를 탐구한다. 이와 관련한 중심적 관심사는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가 『달이 붉게 차오를 때』의 "주인 없는 영토" 장에서 제시한 “부적절한 타자(Inappropriate Other)”이다. 이 책에 재수록된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라는 장에서 트린티는 그를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녀는 안다. 타자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역사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제스처도 삶의 왕복 운동을 작동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26 여기서 관건은 내부자/외부자, 공적/사적, 자아/타자 간 경계가 감시당하고 규율되는 현실을 넘어서, 서로 얽혀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윤리적 감수성이다. 본질화와 동질화의 함정을 동반하는 이분법적 구도는 생산적인 오염(generative contamination)에 자리를 내어준다. 부적절한 타자는 윤리적 긴장을 품은 존재로, 타자성을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안락한 유혹에 저항한다. 트린의 말처럼, 그녀는 항상 최소 두 개 혹은 네 개의 몸짓으로 움직인다. “‘나는 너와 같다’고 긍정하면서 동시에 그 차이를 끈질기게 지시하고, ‘나는 다르다’고 상기시키면서 모든 타자성의 정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27 나아가, 부적절한 타자는 무빙 이미지를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성의 중심지에서 이탈시키고, 민족지학을 사회과학의 도구적 속박으로부터 끊어내며, 새로운 시각, 감각, 사유의 방식을 실험적으로 창출한다. 자율성이라는 허구를 떨쳐내고, 객관성이라는 기만을 포기한 채, 그녀는 주변 세계의 흐름에 반응하며, 현실의 흔적들을 뚜렷하고 상황적인 관점(situated vision)으로 변형시킨다. 비록 현실에서 재현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길을 실수 없이 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녀는 그 길을 시도할 것이다.
트린의 영화적 실천은 이러한 윤리적 입장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재조립 Reassemblage>(1982)에서의 ‘가까이 말하기(speaking nearby)’에 대한 성찰적 사유, 혹은 <성은 비엣, 이름은 남 Surname Viet, Given Name Nam>(1989)에서의 번역과 수행을 통한 인위적인 구성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리얼리즘에 대한 트린의 급진적인 비판28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는 리얼리즘 미학에 헌신하는 많은 작품을 포함해 다양한 형식적 언어 속에서 작동하는 영상 작업들을 함께 다룬다. 역사학자 조앤 월라크 스콧(Joan Wallach Scott)의 말처럼, “페미니즘 방법론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질문하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하나의 정돈된 실체로 제시된 범주들—그 범주가 ‘남성’이나 ‘여성’일 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에 직면할 때마다, 페미니즘 방법론은 변이, 차이, 갈등을 질문해야 한다.”29 그리고 영화사와 영화 이론을 가르는 범주들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 및 비디오의 계보를 엮어나가면서 익숙한 경계들을 횡단하고자 한다. 그 목표는 새로운 성좌(constellations)가 출현하길 바라는 데 있다. 물론 최근 몇년 사이,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과 영화인들이 현실(actuality)에 대한 집념과 형식 실험을 융합하며 둘 사이의 교집합(interstitial space)이 비약적으로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전통은 역사적으로는 다소 분리된 채 발전해 왔고,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이러한 분리를 반영하고 재생산해왔다.30 이러한 분할의 양쪽에는 종종 도식화된 이미지들이 형성된다. 현실과 명확한 정보 전달에 고착된, 투박하게 사실적이고 비성찰적인 형식으로 해석되는 반면, 실험 영화와 비디오는 엘리트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으로 가득 찬, 밀폐된 형식주의 시학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두 분야 내부의 보수적 관점을 강화하며, 다큐멘터리의 창의성과 실험 영화·비디오의 정치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특히 이 두 영역의 경계에 놓인 수많은 작업들, 즉 다큐멘터리의 “객관성”을 문제화하고 실험적 형식에 사회정치적 문제의식을 주입하는 페미니즘적 개입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한 왜곡을 초래한다.
1987년, “언제 실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결합하고 싶다고 느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트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실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분리된 것으로 본 적이 없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나에게 있어서 장르도, 영화 제작의 접근 방식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기성품을 해체하는 과정이며, 자기 자신을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든, 영화적으로든) 보이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즉, 이미 정립된 코드들과 부합하지 않으며, 관객은 물론 감독에게도 사전에 예측되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과정이다.”31
이러한 발언은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 및 비디오가 어떻게 대중매체의 재현 규약에서 벗어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들은 기존의 관념들을 뒤흔들고, 타자의 목소리와 이야기, 이미지를 포함한 대안적인 목소리들이 전달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무빙 이미지의 인식론적·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두 분야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아니다.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비디오는 모두 비전문 장비 (이를테면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나 슈퍼 8mm, 16mm와 같은 아마추어용 필름 포맷)의 습관적 사용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러한 장비의 사용은 제작의 독립성을 촉진하며, 이미지 흐름에 개입하기 위한 기술적 역량과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일반적인 영화 산업에 비해 예산도 매우 적다. 상업 영화 제작과 비교할 때, 이들 작업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지며, 통상적인 프로덕션 가치(production value)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표준화되지 않은, 종종 비상업적인 배급 및 상영 방식을 택하며, 극장이 아닌 교육적, 예술적, 혹은 행동주의적 맥락 등 비극장 환경을 선호한다. 사라 고메즈(Sara Gómez)의 <나의 기여 Mi aporte>(1972),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관객 Audience>(1983), 비디아(Vidéa) 콜렉티브의 <무시도라: 국제 여성 영화제 Musidora: Festival international des films de femmes>(1974)와 같은 작품들이 보여주듯, 상영은 토론의 촉매제로 기능하며 대항 공중(counter-public) 형성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와 담론을 촉진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 및 비디오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영역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 세계 구성의 중요한 장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와 실험적 실천 사이에 날카로운 분리를 두는 입장을 거부하면서,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영미권 페미니즘 영화 이론에서 지배적이었던 리얼리즘 미학과 모더니즘 미학 간의 적대적 구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트린 T. 민하의 주요 참조점이기도 한 클레어 존스턴(Claire Johnston)은 그녀의 영향력 있는 1973년 에세이 「대항 영화로서의 여성 영화 Women’s Cinema as Counter-Cinema」에서, 당시 마르크스주의 영화 이론에서 지배적이었던 환영주의(illusionism)에 대한 비판을 이어받아, 페미니스트 영화 제작의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리얼리즘 미학을 반박한다.32 존스턴에 따르면,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미화이며, 반드시 해체되어야 할 신화다. 장-루이 코몰리(Jean-Louis Comolli), 장 나르보니(Jean Narboni), 피터 월런(Peter Wollen) 등의 비평가들도 1970년 전후 리얼리즘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제기했지만, 이들은 주로 할리우드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반면, 존스턴의 논쟁은 약간 다른 조건에서 등장했다33. 그녀가 보기에 “새롭게 부상한 여성영화의 상당수는 텔레비전과 시네마 베리떼(cinéma vérité)의 기술을 미학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34 존스턴은 미지 맥켄지(Midge MacKenzie)의 <여성들의 말하기 Women Talking>(1970),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의 <세 개의 삶 Three Lives>(1971)을 대표적으로 언급하며, 이들을 재현의 투명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꼽는다.
반대 진영에서는 줄리아 르사지(Julia Lesage)가 1978년의 기념비적인 에세이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 영화의 정치적 미학 The Political Aesthetics of the Feminist Documentary Film」에서 당시 영화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기적 서사, 단순한 형식, 여성 감독과 여성 피사체 사이의 신뢰, 선형적 내러티브 구조, 영화 매체의 유연성에 대한 낮은 자의식—이것들이 1970년대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다.”35 전원 여성 제작진이 만든 70분 분량의 16mm 3부작 <세 개의 삶>에서는 세 명의 백인 여성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다. 르사지에게 이와 같은 영화들은 여성 해방 운동, 특히 개인의 경험을 구조적 억압과 연결하려 했던 ‘페미니스트 의식 고양(feminist consciousness-raising)’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36 한편 존스턴의 시각에서 이들 영화는 하지만 클레어 존스턴의 시각에서 보면, <세 개의 삶>과 같은 영화는 통합된 자아라는 허구를 믿고 매체의 투명성이라는 가짜 가정에 얽매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성들의 발화 내용이 가부장적 규범을 깨뜨릴지라도, 여성 주체성에 대한 집중이 급진적이며, 영화가 여성성의 역사적 조건성을 지시하고, 페미니스트 의식 고취 집단들과 분명한 연결 고리를 지닌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존스턴에게 이 영화는 결국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여성 영화는 이런 이상주의를 감당할 수 없다”고 그녀는 쓴다. “우리 억압의 “진실(truth)”은 카메라의 “순수함”으로 셀룰로이드 위에 “포착”될 수 없다. 그것은 구성되어야 하고, 제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혁명적 전략은 “현실(reality)”의 재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37 존스턴의 이런 주장은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을 결합한 반(反)리얼리즘적 페미니즘 아방가르드의 형성과 맞물려 있었으며, 이 이론적 실천의 밀접한 결합은 E. 앤 캐플런(E. Ann Kaplan)이 로라 멀비(Laura Mulvey)와 피터 월런(Peter Wollen)의 <펜테실레이아: 아마존의 여왕 Penthesilea: Queen of the Amazons>(1974), 샐리 포터(Sally Potter)의 < 스릴러 Thriller>(1979)와 같은 작품들을 “아방가르드 이론 영화(avant-garde theory films)”로 지칭하게 만든다.38
그러나 반리얼리즘 담론에서 논의되었던 “리얼리즘”의 정확한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할리우드의 환영주의와 영화 <세 가지 삶>과 같은 작품이 보여주는 직접성은 엄연히 다른 형식적 체계이며, 각각 관객과 매우 다른 관계를 설정하고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를 점유한다. 영화학자 알렉산드라 주하스(Alexandra Juhasz)가 1994년에 지적했듯,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은 페미니스트 리얼리즘 다큐멘터리의 두 가지 핵심적 특징을 오해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나는 리얼리즘의 관습 아래 대개 복수의(multiple) 영화적 스타일과 이론적 가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며, 더 중요한 점은 리얼리즘과 동일시(identification)가 이러한 영화들 속에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이론적 전략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39 주하스는 리얼리즘이 결코 단일한 층위가 아님을 정당하게 강조한다. “리얼리즘은 부르주아적이고 가부장적인 현실을 확인하고 영속하며 투영하는 방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수많은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리얼리즘은 대안적이고 주변부적이며 전복적이거나 불법적인 현실을 증언할 수 있고,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할 수도 있다.”40 리얼리즘은 특정 정치적 입장과 결속되어 있지 않으며, 이는 클레어 존스턴(Claire Johnston)이 옹호했던 반리얼리즘 또한 마찬가지다. 더욱이 여러 사례가 증명하듯, 리얼리즘적 충동은 매체의 투명성에 대한 회의론과 공존할 수 있으며, 이는 반리얼리즘 전략을 취하는 영화 안에서도 지시성(referentiality)에 대한 관심이 종종 지속되는 것과 같다. 키티코 모레노(Kitico Moreno)의 1975년 작 <여성에 관하여 A próposito de la mujer>를 예로 들어보자. 35분 길이의 이 영화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코스타리카 사회 내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킹 헤드(talking head) 인터뷰 장면과, 마야 데렌(Maya Deren)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표현주의적 장면들이 교차한다. 강렬한 대비의 흑백으로 촬영된 후자의 장면들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며 탐구하는 단독 여성 주인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아방가르드적 기교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증언과 결합하여 영화의 정동적 강도(affective intensity)를 증폭시킨다.
페미니스트 리얼리즘 논쟁은 영미권 영화 이론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러나 리얼리즘 다큐멘터리라는 초기 단계를 소위 더 정교한 아방가르드가 계승했다는 식의 선형적 서사는, 많은 감독이 리얼리즘 미학을 꾸준히 고수해 온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또한 실험주의에 전념했던 많은 여성이 왜, 그리고 어떻게 아방가르드 이론 영화의 패러다임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시각은 페미니스트 논픽션 영화의 더 넓은 영역을 살필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여성들이 제3대륙(Tricontinental)의 해방 영화에 기여한 방식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들이 영상을 개인적 표현과 정치적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한 방식, 혹은 서로 다른 맥락 속의 여성들이 반(反)자기민족지적 전통을 구축해 온 방식 등이 배제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정된 범위의 영미권 이론 논쟁에서 제기된 공격적 주장들은 1970년대 이후 다양한 지역의 페미니스트 논픽션 영화감독들이 채택했던 다각적인 전략들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일을 오랫동안 방해해 왔다. 이러한 전략들은 지역적 긴급성과 초국가적 흐름의 관계 속에서 개념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을 넘어 이 시기의 실천들을 다시 역사화하고, 기존 영미권 기록들을 지배해 온 특정 국가들의 정전 너머로 탐구의 범위를 넓혀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다. 디지털화 작업으로 귀중한 아카이브 자료에 접근하기가 쉬워진 오늘날, 이 중대한 과업은 그 어느 때보다 실현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는 국제적이고 초세대적인 학자, 비평가, 큐레이터 집단이 새롭게 집필한 에세이와 대담들을 한데 모았다. 이 글들은 영화감독들이 남긴 과거의 기록물과 함께 제시되는데, 이 기록물 중 절반은 이번에 처음으로 영문으로 번역되었으며 모든 글에는 현대적 맥락을 짚어주는 해설이 수반되었다. 이 책의 기고문들은 디프 단라지(Deepa Dhanraj), 사피 파예(Safi Faye), 사라 말도로(Sarah Maldoror)와 같은 탈식민주의 영화감독들을 조명한다. 또한, 이 책은 서로 다른 지리적 맥락 속에서 영화와 여성 해방 운동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 페미니즘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 사이의 긴장과 연대를 면밀히 조사하며, 우정과 협력이 여성들의 영화 제작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강조한다. 필자들은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 성적으로 노골적인 이미지, 쾌락의 문제를 검토하고 나이든 여성(grandmother)의 형상에 대해 고찰하며, 페미니스트 영화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묻고 리얼리즘 미학을 비롯한 여러 주제를 논의한다. 이 텍스트들은 단일한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고찰 대상이 되는 무빙 이미지 실천의 이질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들은 이론적 추론, 상세한 역사적 연구, 에세이적 비평, 회고록, 시, 인터뷰, 대담 등 다양한 형식과 방법론적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영화학자 제인 게인즈(Jane Gaines)는 "컨퍼런스, 연구, 출판을 통해 '여성 영화사(women’s film history)'를 정립해 나가는 지속적인 작업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그중 가장 대담하고 도전적인 지점은, 현대 학문이 페미니즘 자체가 잊었거나 간과했던 부분들–단순히 영화 산업의 공식 역사에서 소외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간과했던 것을 강조하는 방식”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41 이 책은 논픽션 실천에 대한 초국가적 초점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려는 의지를 바탕으로 이러한 공백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책은 “잊힌”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지하며 이러한 공백에 접근한다. 특정 영화나 감독이 역사에서 배제되었다는 주장은, 이 책에도 재수록된 1979년 글에서 예술가 리즈 로즈(Lis Rhodes)가 던졌던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을 소환한다.42 한 맥락에서는 무명인 영화가 특정 공동체 내에서는 소중히 여겨질 수 있으며, 그곳에서 꾸준히 상영되고 논의되며 다음 세대로 전해져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지역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지며 제도적 관행에 의해 형성된다. 오스트리아 영화 박물관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미국 대학교의 영화사 강의계획서에 등장하는 작품과 다를 것이다. 이는 또한 런던에 기반을 둔 페미니스트 영화 단체 ‘시네노바(Cinenova)'가 기억하고자 하는 바와 다를 것이며, 타이베이의 '우먼 메이크 웨이브(Women Make Waves)' 영화제가 핵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과도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특정 영화가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특정 영화 문화를 보편화할 위험이 있으며, 그 작품을 긴 시간 동안 지켜온 이들의 돌봄과 노동, 지식을 부당하게 부정할 수 있다. 나아가 페미니스트 영화 간행물 《어나더 게이즈 Another Gaze》의 편집자 다니엘라 슈라이어(Daniella Shreir)가 썼듯이, "'잊힌'이라는 용어는 발굴의 의미를 내포하며 프로그래밍 행위를 마치 결실 있는 고고학적 발굴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이 용어를 사용하는 기관들은 수십 년간 회고전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배제해 오다가, 이제 와서 시의적절하고 정치화된 것처럼 보일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43 망각의 수사학은 발견에 대한 자기만족적인 선언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자본의 축적 및 제도적 권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게인즈(Gaines)가 묘사한 소외는 실재한다. 여성이 제작하거나 여성에 관한 비허구 영화 및 비디오 제작의 역사를 더욱 온전하게 그려내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업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본 서적은 찬드라 탈파데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의 다음과 같은 말을 유념하며, 앞서 행해진 소중한 학술적·큐레이터적 노력들을 발판 삼아 마땅히 다뤄져야 할 수많은 대상 중 일부를 겸허히 다루고자 한다. "페미니즘적 분석은 역사를 다시 쓰고 기억하는 일의 중심성을 언제나 인식해 왔다. 이 과정은 단순히 패권적 남성 중심 역사의 공백, 삭제, 오해를 바로잡는 교정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다시 쓰는 실천 자체가 정치화된 의식과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44 모한티는 '발견(discovery)'에 대한 색다른 개념을 유익하게 제시한다. 이는 소위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며, 대신 현재를 촉발하는 페미니즘의 과거와 끊임없이 씨름하며 변화해 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는 매혹적인 여성들의 작품에 몰입하고, 이들에 대해 말하고 쓰고 이들의 영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의 전율을 이야기한다. 모한티의 이러한 진술은 열린 결말을 지향하는 세계 만들기의 개념과 공명하며, 본 서적과 같이 아카이브 지향적인 프로젝트가 갖는 의의를 개념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는 과거의 총체를 다시 실체화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쫓으며 아카이브적 집착을 충족하기 위해 묻혀 있던 구경거리를 발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와 비디오들은 아카이브 그 자체의 지배적 논리, 즉 포함과 배제의 기준은 물론 아카이브가 구성하고 또 아카이브를 구성해온 역사적 시간의 개념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 작품들은 기존 질서로의 통합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이들은 제작된 당시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더 많은 '지금'에 속해 있다.
이 책은 강의실, 출판물, 카페, 바, 영화관, 가정,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이전의 기억하기와 다시 쓰기 작업들에 빚을 지고 있다. 책의 가장 큰 목표는 미래에 이러한 집단적 행위들이 계속해서 불타오르도록 불씨를 지피는 것이다.
원본 도서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
by Erika Balsom
MIT Press
2022
한옥희는 1974년 이화여자대학교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실험영화 그룹인 ‘카이두 클럽(Kaidu Club)’의 창립 멤버였다. 그곳에서 그는 문학을 공부했다. 큐레이터 김지하의 설명에 따르면 “‘카이두’는 영화 산업에 저항하는 딸들의 이름”이으로, 이는 쿠툴룬(Khutulun)이라는 이름의 전사(warrior) 딸을 두었던 칭기즈 칸의 증손자 이름을 빌린 것이다.1 한국 최초의 여성 실험영화 집단인 카이두 클럽은 독립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영화제와 심포지엄을 조직하면서 주류 영화의 강한 상업주의과 가부장적 경향에 명확히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Untitled 77-A는 이러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기존 산업적·재현적 규범을 거부하며, 당시–그리고 안타깝게도 많은 면에서 여전히–전통적으로 남성의 것으로 여겨졌던 영화제작자의 역할을 여성 자신의 것으로 선언하는 모습을 실험적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는 큰 가위가 중심적인 사물로 나오는데, 이는 그것이 실용적 용도로 쓰이는 편집용 테이블 위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작품 전체에 걸쳐 가위는 영화 제작 과정 전반에 대한 환유적 기표(metonymic signifier)로 등장하며, 현실을 모방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 시간, 의미의 구성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잠재력을 환기시킨다. 주인공이 거리에서 촬영하는 모습을 담은 일관된 금색 톤의 이미지들에 이어, 가위의 클로즈업이 급격히 폭발하듯 일상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역동적인 몽타주에 구두점을 찍는다. 가위는 스카이라인을 빠르게 패닝하는 화면 위에 이중인화(superimpose)되는데, 이는 영화 제작이 도시와의 자율적인 관계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수단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찰과 더불어, 가위는 동시에 강렬한 폭력의 도구, 기존 질서에 대한 페미니즘적 거부의 상징으로 부상한다. 주인공이 필름 조각을 잘라낼 때, 그녀는 마치 그것을 손상시키려는 듯 무심하고도 파괴적인 쾌감으로 작업을 수행한다. 여성 누드 조각상들이 채워진 야외 공간을 핸드헬드로 빠르게 훑고 지나간 후—이는 지배적인 재현 방식이 여성을 도식적인 유형, 즉 인간 이하의 사물로 축소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로 해석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이다—가위는 공중에서 여러 번 격렬하게 허공을 가르다 일련의 빈 화면(blank screen)으로 이어진다. 이는 모든 것이 영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성상파괴적 신념을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적 전형이다. 이후 주인공은 필름스트립을 반복적으로 잘라내고, 컷이 바뀔 때마다 찰흙으로 거칠게 빚어진 신체 부위들이 전체로부터 방금 떨어져 나온 것처럼 툭툭 굴러떨어지는 클로즈업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의 다른 어떤 장면보다도, 이 시퀀스는 날카롭고 뾰족한 도구의 상징성을 강하게 호출한다. 그 도구는 남근적 권력(phallic potency)의 전유와 거세의 위협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는 가위가 무기처럼 사용되어 빈 화면을 연상시키는 흰색 표면에 찔려 들어가며 상처를 내는 순간이다. 그 상처에서는 피처럼 보이는 진홍색 페인트가 과도할만큼 쏟아져나온다.
<무제 77-A>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감독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감독과 편집자 엘리자베타 스빌로바(Yelizaveta Svilova)가 함께 만든 <카메라를 든 사나이 Man with a Movie Camera>(1929)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모두 몽타주의 분석적·종합적 기능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유희적으로 탐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충동과 더불어, 한옥희의 영화는 분명하게 젠더화된 분노와 욕망이 뚜렷하게 구현하며, 세계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영화적 행위를 페미니스트적 신념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카메라를 든 여성은 대중 영화가 반복해온 깜박이는 허구를 단호하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미지를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쾌하게 긍정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한옥희는 자신과 동일시되는 주인공과 함께 화면에 등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컷!”이라고 외친 뒤, 가위를 들어 카메라이자 관객을 향해 찌르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이미지는 움직이는 영상(moving image)이 지닌 표현 가능성에 대한 짜릿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한편, 그에 담긴 마지막 제스처는 동시에 제4의 벽(the fourth wall)을 부수며 관객의 시선을 정면으로 되받아친다. 그간 영화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적대적이었고, 여성을 배제해왔으며, 여성들이 자기 삶과 생각, 감정을 스스로 영상으로 표현할 기회를 부정해왔다. 하지만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자신의 첫 글(1970년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 대회 반대 시위에 대한 첫 비평문으로 마르가리타 히메네즈와 공동 집필, Shrew 지에 게재)에서 말했듯, “스펙터클은 취약하다.”2 그것을 자르고, 산산조각 내고, 뒤집고, 카메라를 들어, 스크린을 다른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 우상파괴와 우상숭배의 욕망이 공존하는 <무제 77-A>는 바로 이 과제를 수행한다. 이 영화는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많은 여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 투쟁의 장이자,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넘어 세계를 재창조하는 방법이었다.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 』는 <무제 77-A>와 같은 영화와 비디오 작품들—즉,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에 대해 다룬 무빙 이미지 작업들—에 바치는 헌사이다.3 책이 다루는 작품들은 상업적 규범에 맞서 만들어졌으며, 젠더화된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는 페미니즘 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시각 매체가 지배와 해방 모두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오래전부터 인식해온 해당 운동의 연장선에서 기획되었다. 또 조직된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작품들도 있으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기지 않지만 그 영화가 페미니즘적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다양한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제작된다. 이러한 실천들은 대개 영화 산업과는 매우 다른 제작 방식을 취한다. 이들은 191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 영화 스크린을 사실상 독점해 왔고, 오늘날까지도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 자본집약적 형태인 장편 극영화(feature-length fiction film)의 패권과 결별한다. 물론 극영화 제작이 페미니즘 개입의 핵심 현장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책은 그 영역을 넘어 주변부를 중심부로 삼는다. 여성들이 가장 많이 활동해 왔고, 영화 제도의 모든 측면을 반대의 관점에서 저항적으로 재구성해온 영역에 주목하는 것이다. 책은 적극적 참여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영화사를 포함한 기존의 영화사에서 빈번히 소외되었던 무빙 이미지의 실천 영역에 주목한다. 이는 바로 “논픽션(nonfiction)”이라는 불완전하지만 실용적인 범주로 묶일 수 있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비디오의 교차하고 분기하는 전통들이다.4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행동주의 비디오 테이프에서 전위적 실험, 에세이 필름에서 다큐픽션, 개인적 증언에서 관찰 다큐멘터리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하나의 톤이나 스타일, 접근 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날것처럼 직접적이고, 시적으로 비유적이며, 기쁨에 차 있으면서도 처절하고, 친밀하면서도 확장적이다. 일부 작품은 벨 훅스가 “백인 우월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부른 체제 아래 살아가는 고통을 조망하고, 다른 작품들은 그 체제 밖에서 존재하는 해방의 방식들을 상상한다.5 많은 작품이 여성성의 힘을 기리고, 공동체적 유대를 찬미한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는 여성들의 삶을 그 구체성과 다양성 속에서 담아낸다.
영화 산업 내에서 지속적인 경력을 쌓은 소수의 여성 감독들—그것이 상업적 주류이든, 더 자주 그렇듯 국제 예술 영화계이든—은 비평적·학문적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수많은 여성 영화·비디오 작가들은 장편 극영화를 만들 기회가 없었거나, 혹은 만들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없었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아주 많이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6 로빈 로리(Robin Laurie)와 마고 내시(Margot Nash)의 <만족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We Aim to Please>(1976)처럼, 어떤 이들은 주류에 도무지 흡수될 수 없는 급진적 시각을 창조하는 데 몰두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탈리아 여성 집단이 만든 <강간 재판 A Trial for Rape>(1979)처럼 협업을 통해 법체계에 내재한 가부장적 폭력을 기록했다. 마르타 로드리게스(Marta Rodriguez)와 호르헤 실바(Jorge Silva)의 <사랑, 여성, 그리고 꽃 Amor, mujeres y flores>(1984-89)처럼 젠더 문제를 계급, 생태, 신식민주의 문제와 연결하기도 했다. 아씨아 제바르(Assia Djebar), 포루그 파로흐자드(Forough Farrokhzad), 츄 먀오진(Qiu Miaojin)처럼 본래는 문학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영화는 단 한두 편만 만든 경우도 있다. 혹은 사라 말도로르(Sarah Maldoror)처럼 아카이브에 실현되지 못한 수많은 프로젝트 계획들만 가득 남겨진 이들도 있다.
소수의 잘 알려진 극영화 감독들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영화 제작의 거대한 영역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채, 기존의 위계와 권위를 되풀이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작가주의(auteurism)는 방대한 작업물에서 개인적 스타일을 식별하는 데 기반을 두며, 감독을 선구적 “거장”으로 신격화하는 개념과 함께, 여성 영화사에서 결정적인 기여들을 오히려 간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해왔다. 1972년, 여성 영화 비평지 「여성과 영화 Women & Film」의 창간사에서 시우화 베(Siew-Hwa Beh)와 소니 세일리어(Saunie Salyer)는 작가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을 “시급한 문제”로 지적한다. 그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작가주의 이론에 여성이 동등한 수로 포함된다 해도, 그것이 영화 제작을 마치 일인극처럼 연출하며 감독을 슈퍼스타로 만드는 억압적 이론임에는 변함이 없다.”7 베와 세일리어는 영화 평가 방식에 대한 대안적 틀뿐만 아니라, 그들이 시스템 영화(system cinema)라고 부르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제작 형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영화가 어떻게 제작되고 유통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정치적 맥락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그들의 창간사는 다음과 같은 연대의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노동자, 흑인, 제3세계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의 해방을 지지하며, 그들이 또한 우리의 해방을 지지해주기를 바란다.”8
비록 「여성과 영화」는 단 3년 동안 5호만 발행되고 짧게 끝났지만, 그 존재는 과거 페미니즘 영화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포괄적이고 전복적인 비전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이 시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필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정신분석가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이 “가장 긴 혁명”이라 불렀던 그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9 페미니즘 영화 비평은 단지 소수 여성들이 배타적인 시스템 안에 포함되는 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성평등을 기업 이사회 내의 적절한 대표성(adequate representation)으로 환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한계에 머문다. 이 책은 베를린 하우스 데어 쿨투렌 데어 벨트(Haus der Kulturen der Welt)에서 열린 전시 및 상영 프로그램 《주인 없는 영토: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No Master Territories: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2022)(이하 ‘주인 없는 영토’)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이런 문제의식을 인식하고 영화 산업의 그림자 속에서, 때로는 그 산업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번성해온 실천들에 주목해온 학술적, 큐레토리얼적 전통을 계승한다.10
이 책은 단순히 전시에 포함된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기록한 도록이 아니라, 전시의 동반 독본이자 독립적인 선집(anthology)으로 기획되었다. 책은 전시가 다루는 연구 영역을 개괄하고 그 안의 실천들에 맥락과 고찰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 너머로 논의의 지평을 확장한다. 1972년 베와 세일리어가 직면했던 것과 유사한 긴급한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 시점에서, 이 책은 세계적 지형 속에서 주요 인물, 맥락, 논쟁을 재조명하며, 여성에 의한, 여성에 관한 논픽션 영화와 비디오 작업들을 교차적이고 다성적으로 분석한다. 물론 이것이 결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결된 기록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 책은 1970~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여성 해방 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에 주로 초점을 맞추며, 세대 간 기억을 복원하려는 집단적 행위로서 과거의 결핍을 보완하고 가능성 있는 역사들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회고적 접근은 과거의 중요한 작업들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긴급한 과제들에 응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표성의 정치, 문화 생산에서의 정체성의 위치, 다큐멘터리와 실험적 실천의 혼성화, 정전(canon)의 미래에 관한 오늘날의 활발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질문들이다. 과거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으며, 현재의 빛 아래 비추어질 때, 잠재되어 있던 역사들이 새롭게 가시화될 수 있다.
이 책이 이처럼 다채로운 구성을 취하게 된 동기는 결코 억압이라는 공통 경험에 기반하여 여성을 단일하고 통합된 집합적 주체로 설정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인종, 계급, 지역의 불평등을 흐릿하게 만들고, 장애혐오와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하며, 연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어렵지만 필수적인 실천을 부정하는 본질주의적 신화를 반복할 뿐이다.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조직가인 롤라 올라페미(Lola Olufemi)의 말처럼, “여성이라는 말은 전략적 연대이며, 우리가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기 위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하는 우산이다. 이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자신을 다르게 정체화했을 이들을 위해 동원될 수 있다. 해방된 미래에는 이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11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는 “여성”이라는 개념 안에 숨어 있는 허위 보편주의를 회피하고자 하며, 그 대신 젠더의 조건성과 억압의 동시성,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을 강조한다. 동시에, “여성적 시선(female gaze)”이나 “여성적 미학(feminine aesthetic)”이라는 식으로 특정한 형식적 특성을 코드화하려는 개념도 거부한다. 이와 같은 공통된 시각 언어를 시대를 초월한 패러다임, 혹은 일종의 영화 장르로 간주하는 관점은 필연적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여성이 일정한 본질적 특성을 공유하며, 그 특성이 일관된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위험한 발상에 근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지식인이자 작가인 실비아 보벤셴(Silvia Bovenschen)은 1976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미니스트 예술’에 대한 형식적 기준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첫째, 예술의 규범이라는 개념 자체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게 되며, 둘째, 페미니즘적 ‘접근’이라는 이름 아래 경직된 미학 논쟁을 재현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12 책은 페미니즘 실천을 단순히 남성 시선에 대한 부정이나, 타고난 자매애에 대한 본질주의적 환상에 가두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에 대해 말하는 논픽션 영화와 비디오의 이질성과 다성성을 기념하며,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다음과 같은 선언을 실천의 정신으로 삼는다. “차이는 단지 용인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창조성이 변증법처럼 튀어오를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 대극(對極)의 자원으로 인식되어야 한다.”13
이 책의 계기가 된 전시의 제목 “주인 없는 영토”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아카이브적 귀환을 의미한다. 이는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의 1991년 에세이집 『달이 붉게 차오를 때: 재현, 젠더, 문화정치 When the Moon Waxes Red: Representation, Gender and Cultural Politics』에 수록된 장의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폐지론적 선언은 깊이 유토피아적이며, 젠더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형태의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한 대담한 세계 재구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단일 이슈로 환원될 수 없는 페미니즘의 의제를 지시하는 이 구절은,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을 짊어진 지리적 이미지를 통해, 전체주의적 통제와 소유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물질적·인식론적 상태를 상상한다. 이는 거장 중심의 예술 작품, 즉 “걸작(masterpiece)”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그에 수반되는 낭만적인 창작 주체 개념을 거부한다. 이 표현은 학제 간의 교차와 수분을 강조하며, 굳어버린 계보를 깨뜨릴 것을 요구한다. 제국주의적 중심과 주변, 지배와 피지배의 분할을 해체함으로써, 위계 없는 횡단적이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연결이 가능한 유동적 공간을 연다.
‘주인 없는 영토’로 이루어진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상(像)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요구는 추진력과 생성적인 힘을 가지며, 억압적인 규범들로부터의 이탈을 드러내고, 근본적인 재구성에 대한 꿈을 불러일으킨다. 철학자 아미아 스리니바산(Amia Srinivasan)은 페미니즘을 “세계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시키려는 정치운동”으로 정의하면서 이와 유사한 전망을 제시한다. 즉, 페미니즘은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들과 관계들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목표로 하지 않는 미래지향적 실천이라는 것이다.14 영화 및 미디어 연구에서 ‘세계 만들기(worldmaking)’라는 개념은 종종 미디어 결과물이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현실과 괴리된 특성을 지닌 세계일수록, 관객은 그 속에서 믿음을 부여하며 감각을 동원하게 된다.15 그러나 스리니바산에게 있어 세계 만들기는 “우리의 재현적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세계를 변형하는 것”을 뜻한다.16 이 개념은 폐쇄적인 디에제시스(diegesis)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헤게모니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방식으로 현실을 다시 기술하고, 그 시선이 다수에게 공유될 때 발생하는 변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세계를 새로 만드는 시도란 곧 현 상태를 거부하고, 기존의 이해 틀을 전복하며, 새로운 것의 출현을 열망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논픽션 영화 및 비디오 실천들을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의 제스처로 개념화함으로써, 스리니바산의 용어 정의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무빙 이미지가 해방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세계 현실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실천들은 단순히 폭력과 차별을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조직하는 격자 자체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리하여 익숙한 것이 페미니즘적 분석의 빛을 통해 새롭게,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도록 한다. 스리니바산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의 시도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새롭게 제안된 현실의 재묘사(redescription)는 지배적인 재현 방식과 경쟁해야 하며, 그 재묘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자리를 잡을 경우에 이해관계가 침해될 당사자들에 의해서도 수용되어야만 한다.”17 그는 또한 “재현적 개입이 자동적으로 세계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전망”에 대한 경계를 촉구한다.18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마감 기한은 존재하는가?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말하기 위해, 새로운 재기술은 어느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수십 년 전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영화와 비디오 속 재묘사들은 여전히 수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은 창작의 순간을 넘어서 흐르고 있으며, 미래의 관객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차이를 요구하는 뜨거운 열망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영감을 주고, 인식을 고양하며, 실제이든 상상이든 공동체를 만들어내며 시대를 관통해 나아간다. 오늘날 다시 이 작업들을 돌아볼 때, 우리는 지배적 재현 질서 안에서 분명히 변화한 부분들과 여전히 정체된 채 남아 있는 문제적 요소들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다. 이 세계 만들기의 시도들은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채,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형태의 도래를 요구하고 있다. 그 형태 중 일부는 어쩌면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전면적 변혁의 꿈을 반복해서 되새기는 일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최근 몇 년간 주류 문화와 정치 전반에서 페미니즘이 부활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이론가 클레어 해밍스(Clare Hemmings)가 말했듯, “페미니즘의 종말만큼 꾸준히 발표되는것도 없지만” 그 반복된 죽음 선언은, 사실상 페미니즘이 여전히 살아 있고,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며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19 (이 점에서 페미니즘과 영화는 닮아 있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포괄적이고 모호한 용어가 되었으며, 신자유주의, 신식민주의, 인종차별, 트랜스포비아와 결탁하는 입장들마저 포섭 가능한 유연한 이름표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즈 베르제스(Françoise Vergès)는 그녀의 책 『탈식민 페미니즘 A Decolonial Feminism』 서두에서 중요한 고백을 한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항상 쉽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 페미니즘의 배신 자체가 그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녀는 질문한다. “이 용어들이 너무나 오염되어 극우조차도 그것을 전유할 수 있게 된 지금, 왜 굳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고, 왜 페미니즘을 옹호해야 하는가?”20 베르제스는 과거와 현재에 있어 페미니즘이 무고하지 않았음을 결정적으로 강조한다. 백인 우월주의와의 공모, "근대화(modernization)”와 여성 인권이라는 명목하에 지배를 영속화하는 가짜 "문명화 임무(civilizing mission)" 속에서의 지속적인 역할, 이슬람 혐오와의 유사성, 교도소 국가(carceral state)와의 밀착, 그리고 다른 형태의 특권을 부정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젠더 억압을 이용하는 행태 등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와 캐서린 로튼버그(Catherine Rottenberg)와 같은 연구자들은 페미니즘의 일부 흐름이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지 설명해왔다. 한때 집단적 해방에 전념했던 운동이 사회 정의라는 이상에서 멀어져 행복, 일과 삶의 균형, 개인적 성취, 자기실현과 같은 가치로 이동하면서 어떻게 무력화되었는지 보여준 것이다.21 이미 1993년 페이퍼 타이거 텔레비전(Paper Tiger Television)은 그들의 재치 있고 예리한 비디오 작품 <시스터후드™: 여성 시장 띄우기 Sisterhood™: Hyping the Female Market>에서, 오늘날 ‘린-인(lean-in)’ 페미니즘으로 알려진 흐름이 어떻게 빈곤층 여성, 이주 여성, 인종화된 여성들을 착취하고 정당화하는지를 지적했다.22 이 여성들은 값싼 소비재 생산 노동자이거나, 돌봄과 청소 노동을 수행한다. 이들의 과도한 노동이야말로 특권층 여성들의 자기계발과 성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는 가려진다. 프레이저, 친치아 아루짜(Cinzia Arruzza), 티티 바타차리아(Tithi Bhattacharya)는 오늘날 도처에 널린 이러한 재현 중심적 태도를 “기회균등을 위한 지배(equal opportunity domination)”라고 명명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태도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드론을 날려 부모를 살해하며, 국경에서 아이를 감금하는 사람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요구하는 것.”23
이러한 현실을 성찰하며, 베르제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만약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가 자본과 국가, 제국의 도구가 되었다면, 우리는 사회 정의, 존엄, 존중, 삶의 정치라는 목표들로 페미니즘 운동을 재활성화함으로써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는 “광범위하고 초국적이며 다원적이고 탈식민적인 정치에 기반한 페미니즘의 재등장”, 다른 하나는 “문명화 페미니즘(civilizational feminism)에 의한 여성 투쟁의 포섭” 때문이다.24 이처럼 베르제스는 페미니즘이 비해방적 세력들에 의해 전유되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페미니즘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비서구권(Global South)에서의 오랜 여성 투쟁의 역사와, 최근 등장한 여성주의 연대체들—예컨대 2016년 이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여성 파업들 (폴란드에서 10만 명 이상의 여성이 낙태 금지에 항의해 거리로 나섰던 운동이 그 예이다)에 영감을 받아, 재구성된 페미니즘 프로젝트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역설한다. 이 책 역시 이러한 입장에 기초한다. 신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현재의 교착 상태를 우회하는 다중의 계보들을 따라가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 가능한 페미니즘의 다른 가능성들을 추적해간다.
영화학자 실리 워런(Shilyh Warre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다큐멘터리의 민족지학적 충동―타자와 마주하고, 타자를 알기를 욕망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탐색하게 되는―은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수많은 여성 감독들의 작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왔다.”25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이러한 성향을 점검하며, 여성 감독들이 민족지학이 타자성(alterity)을 생산하는 데 지속적으로 작동해온 역할과, 그 중심에 자리한 권력, 시선, 지식의 삼각 구조에 어떻게 반응해왔는지를 탐구한다. 이와 관련한 중심적 관심사는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가 『달이 붉게 차오를 때』의 "주인 없는 영토" 장에서 제시한 “부적절한 타자(Inappropriate Other)”이다. 이 책에 재수록된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라는 장에서 트린티는 그를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녀는 안다. 타자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역사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제스처도 삶의 왕복 운동을 작동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26 여기서 관건은 내부자/외부자, 공적/사적, 자아/타자 간 경계가 감시당하고 규율되는 현실을 넘어서, 서로 얽혀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윤리적 감수성이다. 본질화와 동질화의 함정을 동반하는 이분법적 구도는 생산적인 오염(generative contamination)에 자리를 내어준다. 부적절한 타자는 윤리적 긴장을 품은 존재로, 타자성을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안락한 유혹에 저항한다. 트린의 말처럼, 그녀는 항상 최소 두 개 혹은 네 개의 몸짓으로 움직인다. “‘나는 너와 같다’고 긍정하면서 동시에 그 차이를 끈질기게 지시하고, ‘나는 다르다’고 상기시키면서 모든 타자성의 정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27 나아가, 부적절한 타자는 무빙 이미지를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시각성의 중심지에서 이탈시키고, 민족지학을 사회과학의 도구적 속박으로부터 끊어내며, 새로운 시각, 감각, 사유의 방식을 실험적으로 창출한다. 자율성이라는 허구를 떨쳐내고, 객관성이라는 기만을 포기한 채, 그녀는 주변 세계의 흐름에 반응하며, 현실의 흔적들을 뚜렷하고 상황적인 관점(situated vision)으로 변형시킨다. 비록 현실에서 재현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길을 실수 없이 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녀는 그 길을 시도할 것이다.
트린의 영화적 실천은 이러한 윤리적 입장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재조립 Reassemblage>(1982)에서의 ‘가까이 말하기(speaking nearby)’에 대한 성찰적 사유, 혹은 <성은 비엣, 이름은 남 Surname Viet, Given Name Nam>(1989)에서의 번역과 수행을 통한 인위적인 구성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리얼리즘에 대한 트린의 급진적인 비판28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는 리얼리즘 미학에 헌신하는 많은 작품을 포함해 다양한 형식적 언어 속에서 작동하는 영상 작업들을 함께 다룬다. 역사학자 조앤 월라크 스콧(Joan Wallach Scott)의 말처럼, “페미니즘 방법론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질문하는 방식”이라면 “우리가 하나의 정돈된 실체로 제시된 범주들—그 범주가 ‘남성’이나 ‘여성’일 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에 직면할 때마다, 페미니즘 방법론은 변이, 차이, 갈등을 질문해야 한다.”29 그리고 영화사와 영화 이론을 가르는 범주들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 및 비디오의 계보를 엮어나가면서 익숙한 경계들을 횡단하고자 한다. 그 목표는 새로운 성좌(constellations)가 출현하길 바라는 데 있다. 물론 최근 몇년 사이,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과 영화인들이 현실(actuality)에 대한 집념과 형식 실험을 융합하며 둘 사이의 교집합(interstitial space)이 비약적으로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전통은 역사적으로는 다소 분리된 채 발전해 왔고,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이러한 분리를 반영하고 재생산해왔다.30 이러한 분할의 양쪽에는 종종 도식화된 이미지들이 형성된다. 현실과 명확한 정보 전달에 고착된, 투박하게 사실적이고 비성찰적인 형식으로 해석되는 반면, 실험 영화와 비디오는 엘리트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으로 가득 찬, 밀폐된 형식주의 시학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두 분야 내부의 보수적 관점을 강화하며, 다큐멘터리의 창의성과 실험 영화·비디오의 정치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특히 이 두 영역의 경계에 놓인 수많은 작업들, 즉 다큐멘터리의 “객관성”을 문제화하고 실험적 형식에 사회정치적 문제의식을 주입하는 페미니즘적 개입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한 왜곡을 초래한다.
1987년, “언제 실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결합하고 싶다고 느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트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실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분리된 것으로 본 적이 없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나에게 있어서 장르도, 영화 제작의 접근 방식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기성품을 해체하는 과정이며, 자기 자신을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이데올로기적으로든, 영화적으로든) 보이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즉, 이미 정립된 코드들과 부합하지 않으며, 관객은 물론 감독에게도 사전에 예측되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과정이다.”31
이러한 발언은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 및 비디오가 어떻게 대중매체의 재현 규약에서 벗어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들은 기존의 관념들을 뒤흔들고, 타자의 목소리와 이야기, 이미지를 포함한 대안적인 목소리들이 전달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무빙 이미지의 인식론적·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 두 분야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은 아니다.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비디오는 모두 비전문 장비 (이를테면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나 슈퍼 8mm, 16mm와 같은 아마추어용 필름 포맷)의 습관적 사용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러한 장비의 사용은 제작의 독립성을 촉진하며, 이미지 흐름에 개입하기 위한 기술적 역량과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일반적인 영화 산업에 비해 예산도 매우 적다. 상업 영화 제작과 비교할 때, 이들 작업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지며, 통상적인 프로덕션 가치(production value)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표준화되지 않은, 종종 비상업적인 배급 및 상영 방식을 택하며, 극장이 아닌 교육적, 예술적, 혹은 행동주의적 맥락 등 비극장 환경을 선호한다. 사라 고메즈(Sara Gómez)의 <나의 기여 Mi aporte>(1972),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의 <관객 Audience>(1983), 비디아(Vidéa) 콜렉티브의 <무시도라: 국제 여성 영화제 Musidora: Festival international des films de femmes>(1974)와 같은 작품들이 보여주듯, 상영은 토론의 촉매제로 기능하며 대항 공중(counter-public) 형성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와 담론을 촉진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다큐멘터리와 실험 영화 및 비디오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영역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 세계 구성의 중요한 장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와 실험적 실천 사이에 날카로운 분리를 두는 입장을 거부하면서, 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하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영미권 페미니즘 영화 이론에서 지배적이었던 리얼리즘 미학과 모더니즘 미학 간의 적대적 구도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트린 T. 민하의 주요 참조점이기도 한 클레어 존스턴(Claire Johnston)은 그녀의 영향력 있는 1973년 에세이 「대항 영화로서의 여성 영화 Women’s Cinema as Counter-Cinema」에서, 당시 마르크스주의 영화 이론에서 지배적이었던 환영주의(illusionism)에 대한 비판을 이어받아, 페미니스트 영화 제작의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리얼리즘 미학을 반박한다.32 존스턴에 따르면,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미화이며, 반드시 해체되어야 할 신화다. 장-루이 코몰리(Jean-Louis Comolli), 장 나르보니(Jean Narboni), 피터 월런(Peter Wollen) 등의 비평가들도 1970년 전후 리얼리즘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제기했지만, 이들은 주로 할리우드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반면, 존스턴의 논쟁은 약간 다른 조건에서 등장했다33. 그녀가 보기에 “새롭게 부상한 여성영화의 상당수는 텔레비전과 시네마 베리떼(cinéma vérité)의 기술을 미학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34 존스턴은 미지 맥켄지(Midge MacKenzie)의 <여성들의 말하기 Women Talking>(1970),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의 <세 개의 삶 Three Lives>(1971)을 대표적으로 언급하며, 이들을 재현의 투명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꼽는다.
반대 진영에서는 줄리아 르사지(Julia Lesage)가 1978년의 기념비적인 에세이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 영화의 정치적 미학 The Political Aesthetics of the Feminist Documentary Film」에서 당시 영화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기적 서사, 단순한 형식, 여성 감독과 여성 피사체 사이의 신뢰, 선형적 내러티브 구조, 영화 매체의 유연성에 대한 낮은 자의식—이것들이 1970년대 페미니스트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다.”35 전원 여성 제작진이 만든 70분 분량의 16mm 3부작 <세 개의 삶>에서는 세 명의 백인 여성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다. 르사지에게 이와 같은 영화들은 여성 해방 운동, 특히 개인의 경험을 구조적 억압과 연결하려 했던 ‘페미니스트 의식 고양(feminist consciousness-raising)’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36 한편 존스턴의 시각에서 이들 영화는 하지만 클레어 존스턴의 시각에서 보면, <세 개의 삶>과 같은 영화는 통합된 자아라는 허구를 믿고 매체의 투명성이라는 가짜 가정에 얽매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성들의 발화 내용이 가부장적 규범을 깨뜨릴지라도, 여성 주체성에 대한 집중이 급진적이며, 영화가 여성성의 역사적 조건성을 지시하고, 페미니스트 의식 고취 집단들과 분명한 연결 고리를 지닌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존스턴에게 이 영화는 결국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여성 영화는 이런 이상주의를 감당할 수 없다”고 그녀는 쓴다. “우리 억압의 “진실(truth)”은 카메라의 “순수함”으로 셀룰로이드 위에 “포착”될 수 없다. 그것은 구성되어야 하고, 제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혁명적 전략은 “현실(reality)”의 재현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37 존스턴의 이런 주장은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을 결합한 반(反)리얼리즘적 페미니즘 아방가르드의 형성과 맞물려 있었으며, 이 이론적 실천의 밀접한 결합은 E. 앤 캐플런(E. Ann Kaplan)이 로라 멀비(Laura Mulvey)와 피터 월런(Peter Wollen)의 <펜테실레이아: 아마존의 여왕 Penthesilea: Queen of the Amazons>(1974), 샐리 포터(Sally Potter)의 < 스릴러 Thriller>(1979)와 같은 작품들을 “아방가르드 이론 영화(avant-garde theory films)”로 지칭하게 만든다.38
그러나 반리얼리즘 담론에서 논의되었던 “리얼리즘”의 정확한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할리우드의 환영주의와 영화 <세 가지 삶>과 같은 작품이 보여주는 직접성은 엄연히 다른 형식적 체계이며, 각각 관객과 매우 다른 관계를 설정하고 서로 다른 사회적 위치를 점유한다. 영화학자 알렉산드라 주하스(Alexandra Juhasz)가 1994년에 지적했듯,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은 페미니스트 리얼리즘 다큐멘터리의 두 가지 핵심적 특징을 오해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나는 리얼리즘의 관습 아래 대개 복수의(multiple) 영화적 스타일과 이론적 가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며, 더 중요한 점은 리얼리즘과 동일시(identification)가 이러한 영화들 속에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효한 이론적 전략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39 주하스는 리얼리즘이 결코 단일한 층위가 아님을 정당하게 강조한다. “리얼리즘은 부르주아적이고 가부장적인 현실을 확인하고 영속하며 투영하는 방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수많은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리얼리즘은 대안적이고 주변부적이며 전복적이거나 불법적인 현실을 증언할 수 있고,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할 수도 있다.”40 리얼리즘은 특정 정치적 입장과 결속되어 있지 않으며, 이는 클레어 존스턴(Claire Johnston)이 옹호했던 반리얼리즘 또한 마찬가지다. 더욱이 여러 사례가 증명하듯, 리얼리즘적 충동은 매체의 투명성에 대한 회의론과 공존할 수 있으며, 이는 반리얼리즘 전략을 취하는 영화 안에서도 지시성(referentiality)에 대한 관심이 종종 지속되는 것과 같다. 키티코 모레노(Kitico Moreno)의 1975년 작 <여성에 관하여 A próposito de la mujer>를 예로 들어보자. 35분 길이의 이 영화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코스타리카 사회 내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킹 헤드(talking head) 인터뷰 장면과, 마야 데렌(Maya Deren)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표현주의적 장면들이 교차한다. 강렬한 대비의 흑백으로 촬영된 후자의 장면들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며 탐구하는 단독 여성 주인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아방가르드적 기교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증언과 결합하여 영화의 정동적 강도(affective intensity)를 증폭시킨다.
페미니스트 리얼리즘 논쟁은 영미권 영화 이론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러나 리얼리즘 다큐멘터리라는 초기 단계를 소위 더 정교한 아방가르드가 계승했다는 식의 선형적 서사는, 많은 감독이 리얼리즘 미학을 꾸준히 고수해 온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또한 실험주의에 전념했던 많은 여성이 왜, 그리고 어떻게 아방가르드 이론 영화의 패러다임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시각은 페미니스트 논픽션 영화의 더 넓은 영역을 살필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여성들이 제3대륙(Tricontinental)의 해방 영화에 기여한 방식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들이 영상을 개인적 표현과 정치적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한 방식, 혹은 서로 다른 맥락 속의 여성들이 반(反)자기민족지적 전통을 구축해 온 방식 등이 배제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정된 범위의 영미권 이론 논쟁에서 제기된 공격적 주장들은 1970년대 이후 다양한 지역의 페미니스트 논픽션 영화감독들이 채택했던 다각적인 전략들을 세밀하게 기록하는 일을 오랫동안 방해해 왔다. 이러한 전략들은 지역적 긴급성과 초국가적 흐름의 관계 속에서 개념화되어야 한다. 이제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을 넘어 이 시기의 실천들을 다시 역사화하고, 기존 영미권 기록들을 지배해 온 특정 국가들의 정전 너머로 탐구의 범위를 넓혀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다. 디지털화 작업으로 귀중한 아카이브 자료에 접근하기가 쉬워진 오늘날, 이 중대한 과업은 그 어느 때보다 실현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페미니즘적 세계 만들기와 무빙 이미지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는 국제적이고 초세대적인 학자, 비평가, 큐레이터 집단이 새롭게 집필한 에세이와 대담들을 한데 모았다. 이 글들은 영화감독들이 남긴 과거의 기록물과 함께 제시되는데, 이 기록물 중 절반은 이번에 처음으로 영문으로 번역되었으며 모든 글에는 현대적 맥락을 짚어주는 해설이 수반되었다. 이 책의 기고문들은 디프 단라지(Deepa Dhanraj), 사피 파예(Safi Faye), 사라 말도로(Sarah Maldoror)와 같은 탈식민주의 영화감독들을 조명한다. 또한, 이 책은 서로 다른 지리적 맥락 속에서 영화와 여성 해방 운동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 페미니즘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 사이의 긴장과 연대를 면밀히 조사하며, 우정과 협력이 여성들의 영화 제작 실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강조한다. 필자들은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 성적으로 노골적인 이미지, 쾌락의 문제를 검토하고 나이든 여성(grandmother)의 형상에 대해 고찰하며, 페미니스트 영화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묻고 리얼리즘 미학을 비롯한 여러 주제를 논의한다. 이 텍스트들은 단일한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고찰 대상이 되는 무빙 이미지 실천의 이질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들은 이론적 추론, 상세한 역사적 연구, 에세이적 비평, 회고록, 시, 인터뷰, 대담 등 다양한 형식과 방법론적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영화학자 제인 게인즈(Jane Gaines)는 "컨퍼런스, 연구, 출판을 통해 '여성 영화사(women’s film history)'를 정립해 나가는 지속적인 작업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그중 가장 대담하고 도전적인 지점은, 현대 학문이 페미니즘 자체가 잊었거나 간과했던 부분들–단순히 영화 산업의 공식 역사에서 소외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간과했던 것을 강조하는 방식”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41 이 책은 논픽션 실천에 대한 초국가적 초점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을 가로지르려는 의지를 바탕으로 이러한 공백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책은 “잊힌”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지하며 이러한 공백에 접근한다. 특정 영화나 감독이 역사에서 배제되었다는 주장은, 이 책에도 재수록된 1979년 글에서 예술가 리즈 로즈(Lis Rhodes)가 던졌던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을 소환한다.42 한 맥락에서는 무명인 영화가 특정 공동체 내에서는 소중히 여겨질 수 있으며, 그곳에서 꾸준히 상영되고 논의되며 다음 세대로 전해져 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지역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지며 제도적 관행에 의해 형성된다. 오스트리아 영화 박물관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미국 대학교의 영화사 강의계획서에 등장하는 작품과 다를 것이다. 이는 또한 런던에 기반을 둔 페미니스트 영화 단체 ‘시네노바(Cinenova)'가 기억하고자 하는 바와 다를 것이며, 타이베이의 '우먼 메이크 웨이브(Women Make Waves)' 영화제가 핵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과도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특정 영화가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특정 영화 문화를 보편화할 위험이 있으며, 그 작품을 긴 시간 동안 지켜온 이들의 돌봄과 노동, 지식을 부당하게 부정할 수 있다. 나아가 페미니스트 영화 간행물 《어나더 게이즈 Another Gaze》의 편집자 다니엘라 슈라이어(Daniella Shreir)가 썼듯이, "'잊힌'이라는 용어는 발굴의 의미를 내포하며 프로그래밍 행위를 마치 결실 있는 고고학적 발굴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이 용어를 사용하는 기관들은 수십 년간 회고전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배제해 오다가, 이제 와서 시의적절하고 정치화된 것처럼 보일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43 망각의 수사학은 발견에 대한 자기만족적인 선언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자본의 축적 및 제도적 권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게인즈(Gaines)가 묘사한 소외는 실재한다. 여성이 제작하거나 여성에 관한 비허구 영화 및 비디오 제작의 역사를 더욱 온전하게 그려내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업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본 서적은 찬드라 탈파데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의 다음과 같은 말을 유념하며, 앞서 행해진 소중한 학술적·큐레이터적 노력들을 발판 삼아 마땅히 다뤄져야 할 수많은 대상 중 일부를 겸허히 다루고자 한다. "페미니즘적 분석은 역사를 다시 쓰고 기억하는 일의 중심성을 언제나 인식해 왔다. 이 과정은 단순히 패권적 남성 중심 역사의 공백, 삭제, 오해를 바로잡는 교정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하고 다시 쓰는 실천 자체가 정치화된 의식과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44 모한티는 '발견(discovery)'에 대한 색다른 개념을 유익하게 제시한다. 이는 소위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며, 대신 현재를 촉발하는 페미니즘의 과거와 끊임없이 씨름하며 변화해 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는 매혹적인 여성들의 작품에 몰입하고, 이들에 대해 말하고 쓰고 이들의 영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의 전율을 이야기한다. 모한티의 이러한 진술은 열린 결말을 지향하는 세계 만들기의 개념과 공명하며, 본 서적과 같이 아카이브 지향적인 프로젝트가 갖는 의의를 개념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는 과거의 총체를 다시 실체화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쫓으며 아카이브적 집착을 충족하기 위해 묻혀 있던 구경거리를 발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와 비디오들은 아카이브 그 자체의 지배적 논리, 즉 포함과 배제의 기준은 물론 아카이브가 구성하고 또 아카이브를 구성해온 역사적 시간의 개념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 작품들은 기존 질서로의 통합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이들은 제작된 당시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더 많은 '지금'에 속해 있다.
이 책은 강의실, 출판물, 카페, 바, 영화관, 가정,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이전의 기억하기와 다시 쓰기 작업들에 빚을 지고 있다. 책의 가장 큰 목표는 미래에 이러한 집단적 행위들이 계속해서 불타오르도록 불씨를 지피는 것이다.
원본 도서 Feminist Worldmaking and the Moving Image
by Erika Balsom
MIT Press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