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brid Documentary and Non-Binary Cinema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와 논바이너리 시네마
번역 황지원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와 논바이너리 시네마 Hybrid Documentary and Non-Binary Cinema』는 동시대 다큐멘터리 영화의 형식, 미학, 윤리를 폭넓게 탐구한다. 이 책은 먼저 ‘다큐멘터리 영화’의 경계와 정의를 검토하는 데서 출발하여, 오늘날 작품들 중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어 일련의 사례 연구를 통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fictional films) 사이에서 작업하는 감독들의 비전과 동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작품들이 제기하는 미학적·윤리적 과제를 논의하며, 인터넷 이후, 그리고 메타버스의 영역 속에서 전개될 논픽션 영화의 미래를 전망한다. 이 책은 새로운 경향을 탐색하려는 독자에게는 입문서로, 이미 이 분야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학제적 성격을 지닌 이 책은 영화, 순수미술, 인류학, 다큐멘터리, 사회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독자층을 아우른다.
1장 ‘리얼(Real)’을 프레이밍하기1
1.1 우리가 ‘논픽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오늘날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탐색하며 시작한다. 동시에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극영화로부터 스스로의 경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서두는 이 책의 핵심 의도를 개괄한다. 즉, 동시대 논픽션 영화의 다의성을 고찰하고, 이후의 장들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울리게 될 핵심 질문들을 제시한다. 이 장은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 혹은 논바이너리 시네마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조건과 배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해석을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산되는 현실과 긴밀히 맞물려 변화해 온 용어들과 연결시킨다. 이 장은 이렇게 묻는다. 진실(truth), 혹은 진실들(truths), 혹은 현실들(realities)을 재현하기 위해 그 ‘경계선’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책의 마지막 장을 닫은 이후에도 짧은 에세이와 사례 연구 사이에서 공명하며 확장될 하나의 질문으로 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논픽션 영화(non-fiction cinema)’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책의 중심 목적은 동시대 논픽션 영화의 다의성(polysemy)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 책은 수많은 영화감독의 목소리, 영화에 대한 서술, 그리고 쏟아지는 질문들을 모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서 영화 제작을 사유한다. 여기서 우리가 공유하는 현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처리하는 예술은 취약하지만 나날이 팽창하는 가능성을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논픽션 영화의 확장적이고 하이브리드적인 형식(hybrid forms)을 탐구하기 앞서, 나는 먼저 기존의 정의들과 학문적 제약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규제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즉, 논픽션과 픽션을 구분 짓는 매개변수(parameter)는 무엇인가? 진실, 혹은 다수의 진실, 또는 현실들을 묘사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그 경계선은 과연 어떤 형태인가?
질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연구의 기점인 나 자신의 위치성(positionality)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인정하고자 한다. 나는 영국 다큐멘터리 산업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쌓아온 백인 남성이며, 유럽식 교육을 받았고, 주로 자국 내 미디어 생태계 속에서 영화를 관람해왔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전에 몰랐던 예술가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을 탐구할 기회를 얻었지만, 나의 시야는 지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참고 작품들, 그리고 대부분 영국 및 유럽의 영화제에서 접할 수 있었던 작품들로 제한되어 있다. 이 책의 논의를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포맷이라는 광범위한 영역 안에 집중하기 위해, 내가 이 글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은 장편 다큐멘터리(feature-length documentary)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특정 형식은 자원과 재현의 측면에서 배타적이었으며, 20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식민적이고 착취적인 권력, 서사, 제작, 관객성의 형태를 거리낌 없이 유지해왔다.
따라서 나는 논픽션 영화 내의 보다 다원적인 목소리를 사유하고자 심층 논의의 시간적 범위를 최근의 제작 시기로 한정했다. 사례 연구들은 2011년부터 2024년 사이에 발표된, 최근의 기억 속에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다. 21세기 영화감독들의 작업에 집중함으로써 나는 논픽션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자 하며, 동시에 이 책 너머에서 탐구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역사적 작품들과의 연속적인 맥락 또한 함께 탐색하고자 한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의 역사나 계보를 기록하거나 정리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다만 그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특정한 순간들과 작품들 (어떤 것은 널리 알려졌고, 어떤 것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인용하며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영화사에는 수많은 리좀(rhizome)들이 존재하여 끊임없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논픽션 영화의 새로운 형태를 틔워내고 있다. 이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영화, 실험 영화, 투쟁(militant) 영화, DIY, 그리고 사적 영화라는 새로운 접선의 운동들을 재정립하고 형성한다.
이 책에 인용된 작품들은 가장 유명하거나 널리 배급된 영화가 아닐 수 있으며, 기술적인 완성도 또한 높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에 결함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상상력과 제작(production)이 충돌하는 마찰의 공간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고 반추하는 가장 흥미로운 제안들 중 일부가 탄생한다. 단순한 완성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유희하고 공유하려는 태도, ‘아름다운 의도의 증거로서 불완전함(imperfection as evidence of beautiful intention)’으로부터 말이다. 이 책에 포함된 많은 작품들은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분류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20세기적 명명법으로서의 ‘다큐멘터리’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무빙이미지 작업(moving image artwork)’, ‘시네마’, 혹은 장르의 이름을 따라 ‘호러’, ‘스릴러’, ‘SF’ 등의 명칭으로 불린다. 아마도 존 코너(John Corner)가 『The Art of Record: A Critical Introduction to Documentary 기록의 예술: 다큐멘터리에 대한 비판적 입문』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이해할 때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인가?”라고 묻는 것보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적 프로젝트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이러한 영화의 유형화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처음부터 복잡한 형세를 이루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스코틀랜드의 영화감독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은 다큐멘터리를 ‘현실의 창조적 처리(creative treatment of reality)’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리얼리티(reality)란, 이미 그 자체로 모든 사람들 (감독이든, 시민이든, 제도이든, 예술가이든)이 함께 관여하는 창조적 과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창조적이지 않은 리얼리티의 처리는 어떤 양상을 띠고 있을까?
우리가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방식은 대부분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규범, 신념과 교리, 정치 체제 등을 거쳐, 최근에는 상업적 스크린 기술과 플랫폼을 매개로 하여 리얼리티를 인식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작가와 감독들이 무빙 이미지(moving images)를 가지고 어떻게 유희하며 리얼리티의 이미지를 조직하는지에 대한 사유는 우리 모두가 현재와 앞으로의 리얼리티를 집단적으로 탐색하고, 형성하며, 통제하고, 또 그 리얼리티를 희망하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만큼만 깊어질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만약 ‘픽션’이 영화적 항해 속에서 우연을 배제하고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존 그리어슨의 ‘다큐멘터리’는 의식있는 목격자이자, 왜곡된 요술 거울(fun house mirror)일 것이다.
사실 그리어슨이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개념화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이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이분법은 1895년 영화의 탄생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창조적 다큐멘터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많은 작품들은 영화가 탄생한 후 약 30년, 즉 경계가 모호한 과도기에 존재했던 영화 예술의 성장기 속에서 제작되었다. 100년도 더 된 이 초기의 영화들은 리얼리티를 다루기 위해 인공적인 이미지 구성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로버트 J. 플래허티(Robert J. Flaherty)의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는 연출과 연기를 통해 북극 지역 이누크 사냥꾼의 삶의 초상을 그렸다.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키노 아이 Kino-Eye〉(1924)는 소비에트 농촌 마을의 삶을 실험적 촬영기법과 함께 만화경처럼 구성한 시각적 교향시였다. 벤야민 크리스텐센(Benjamin Christensen)의 〈마녀들 Häxan〉(1922)은 사실적 텍스트와 연구, 그리고 극화와 삽화를 결합해 마법과 신비주의의 역사를 탐구했다. 그리고 한스 발터 콘블룸(Hanns Walter Kornblum), 루돌프 비브라흐(Rudolf Biebrach), 요하네스 마이어(Johannes Meyer)의 〈우리의 천체 Our Heavenly Bodies〉(1925)는 관찰된 풍경, 외계적 모형, 그리고 극화된 사변적 우주 탐사 사이를 오가며, 당시 인류가 알고 있던 우주의 지식과 알려진 미지의 영역(known unknowns)을 보여주었다.
이후 100년에 걸쳐, 다큐멘터리라는 논픽션 예술 형식은 형태를 빚고, 경계를 흐리고, 때로는 부수며, 확장하고, 다시 수축하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그러면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될 수 없는가’를 고정시키려는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는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존재하기 되는지를 묻는 시도보다 훨씬 빈번했다. 다큐멘터리를 픽션과 구분되는 독립된 영화 형식으로 명명함으로써 발생한 이분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큐멘터리의 핵심 가치와 이해를 형성한 정전적(canonical) 영화들의 계보를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주변부의 영화들(peripheral cinema) 역시 탄생시켰다. 이는 각 시대가 규정한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의 개념적 한계치, 즉 그 경계와 틈새에서 작동하며 분류의 절벽이나 중첩된 지점에 침투하고 간섭하는 다큐멘터리들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 연구자 빌 니콜스(Bill Nichols)는 아마도 최근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다큐멘터리 제작 양식의 분류 작업을 수행한 작가일 것이다. 그는 2001년 출간한 저서 『다큐멘터리 입문 Introduction to Documentary』에서 다큐멘터리의 주요한 양식으로 시적(poetic), 설명적(expository), 관찰적(observational), 상호작용/참여적(interactive/participatory), 성찰적(reflexive), 수행적(performative) 양식을 제시했다. 니콜스는 다큐멘터리가 시간에 따라 진화하고, 경계가 유동적인 형식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픽션과 논픽션 영화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벤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는데, 각 원의 중첩 부분에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 다큐드라마(docudrama), 사실 기반 재연(true-to-life re-enactment) 영화와 같이 상이한 두 영역 사이의 구분을 통상적으로 유지하는 운동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인터-시네마(inter-cinema)’의 공간을 제안하는 대신, 유동적인 시네마(fluid cinema)라는 개념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범주들은 동시에,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의 영화 형식 사이의 혼성성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일부는 다큐멘터리이면서 일부는 드라마이고, 일부는 그 형식에 대한 풍자이며, 일부는 재연(enactment)이고, 일부는 재현적 극화(representative dramatisation)인 것이다.
심지어 다큐멘터리 상영과 배급을 담당하는 이들조차 이러한 이중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방송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는 다양한 장르가 서로의 내용을 뒤섞으며 ‘사실 기반 엔터테인먼트(factual entertainment)’, ‘구성된 리얼리티(constructed reality)’, 혹은 ‘비각본(unscripted)’ 같은 모순적인 범주 아래 묶이곤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마치 모든 논픽션 영상 작업이 각본 없는 방식을 포함하지 않는 생산 방식인 양 제시된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는 ‘도피성 리얼리티 TV(escapist reality TV)‘라는 플랫폼 카테고리를 활용하는데, 이는 현실적 상황에 오락적 요소를 주입하려는 욕망의 역설적 표현이다. 한편, CPH:DOX(코펜하겐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유사-픽션(para-fictions)이라는 섹션을 운영하며, 비전문 배우들이 사전에 설정된 시나리오 속에서 즉흥적인 자전적-픽션(auto-fiction)을 펼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21세기 들어 대중 담론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바라보는 인식을 확장시키며, 영화감독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의 다양한 버전들, 즉 그것을 구성하고 시각화하며 만들어내는 주관적 제작 방식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빌 니콜스는 2010년에 출간된 『다큐멘터리 입문』 제2판에서 2001년 초판의 분류 체계를 보완했다. 그는 서문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관계를 설명하며, 겉보기에는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 두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다루는 것”, 다른 하나는 “감독이 상상해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이 두 범주의 차이가 결코 절대적인 분리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각 영화 형식은 서로의 영역에서 표현 기법과 창작 방법을 차용하거나 모방하거나 변용하며, 따라서 “두 세계의 경계는 매우 유동적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인식 가능한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콜스가 말하는 그 ‘경계’란 정확히 무엇이며, 그가 궁극적으로 인식 가능한 차이로 지목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칼 플란티가(Carl Plantinga)는 그의 에세이 「결국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What Is Documentary After All」(2005)에서 진실성(veridicality)을 결정적 기준으로 제시한다. 니콜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진실한 재현(veridical representation)’의 관습 또한 역사에 따라 변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허구화의 행위가 논픽션 영화의 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해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장면의 연출과 재연은 다큐멘터리 역사 첫 65년 동안 일상적이며 정당한 제작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티가는 여전히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 사이의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그 차이는 경우에 따라 미묘하고 복합적일 수 있다. 그는 “예컨대 순전히 허구적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를 ‘진실한 재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배우가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다면, 그들의 복장, 대사, 행동이 충분한 연구에 기반하여 역사적 정확성을 갖춘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진실된 재현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빌 니콜스의 저작과 함께 언급되는 스텔라 브루지(Stella Bruzzi)의 기념비적 저서 『신다큐멘터리 New Documentary』(2000)는 밀레니엄 시대에 발표되었으며, 논픽션 영화에서 위치성과 자기반성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를 촉구했다. 그는 모든 영화 제작이 본질적으로 구성된 행위이며, 그것이 기록물에 미치는 영향을 전면에 내세웠다. 브루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결코 단순히 현실을 재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현실 공간과 그 공간에 개입하는 영화감독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퍼포먼스는 언제나 다큐멘터리 제작의 핵심에 있어 왔지만, 위조(falsification)와 허구화라는 함의를 지닌다는 이유로 의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특성들은 전통적으로 논픽션이 추구하는 바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작가성(authorship), 퍼포먼스, 그리고 개입을 논픽션 영화 제작의 별도 양식으로 분류하려 했던 이전의 시도들과 달리, 브루지는 다큐멘터리를 오직 “다큐멘터리 제작자, 기록 기술, 그리고 출연자 사이의 만남에 대한 기록”으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다큐멘터리는 재현에 있어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만남이자, 상호작용의 산물이었다. 브루지는 다음과 같이 쓴다. “감독의 명시적인 개입은 영화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단호한 질문으로 인해 ‘편향되지 않은 영화(unbiased film)’라는 다큐멘터리 이론의 이상이 끝났음을 드러낸다. 즉, 다큐멘터리란 제작진이 도착하기 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의 도착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해버린 상황과 영화 제작자, 제작진 사이의 대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협업적 구성의 문제는 아래에서 재수록되고 개정된 나의 에세이 「리얼을 함께 만들기 Making It Real Together」에서 더욱 깊이 탐구될 것이다.
여기서 논픽션 영화에 대한 다의적인(polysemic) 개념을 제시하는 나의 의도가 결코 느슨하고 상대적인 담론의 장으로 빠지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은 「현실-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2017)에서 관찰적 영화와 책임 있는 논픽션 제작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녀는 가짜 뉴스, 인공지능 딥페이크, 붕괴하는 저널리즘 생태계로 특징지어지는 ‘탈진실(post-truth)’ 시대 속에서 공유된 진실의 개념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영화의 더 다원적인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진실과 맺는 관계가 취약하고,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으며, 해체보다는 더 세밀한 분화가 필요한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정서 또한 공유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다큐멘터리 이미지에 대한 신뢰가 영화 발명 이래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 놓여 있는 시대에 글을 쓰고 있으며, 또한 이 책에서 논의되는 영화들이 ‘진실’을 제시함에 있어 덜 직접적이거나 덜 재현적인 방식을 취함으로써, 논픽션 영화의 사실적 토대를 재확인하는 데 위험 요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마리아 린드(Maria Lind)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그린룸: 다큐멘터리와 동시대 미술에 관한 재고 The Greenroom: Reconsidering the Documentary and Contemporary Art』(2008)(이하 ‘그린룸’)의 서문에서 지적하듯, ‘이중 구속은 강력하다. 한편으로 다큐멘터리 이미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재현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 이 에세이들의 의도는 논픽션 시네마에 대한 신뢰를 더 말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내어 의미와 가능성, 그리고 이미지 리터러시를 다시 끌어들이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연관된 사실성이라는 요소는 그 짧은 역사 동안 형식적 실험의 가능성에 다양한 제약과 기대, 그리고 부담을 지워왔다. 다큐멘터리가 정보의 유통과 동일시되면서, 그 방향성이 픽션 작업보다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이데올로기적 틀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20세기를 거치며 국가적, 국제적으로 조정된 다양한 선전 활동에 봉사하거나, 연대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더 최근에는 이 매체를 통해 관객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제3섹터 기구들과 자선가들의 가치 체계에 의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개인적 관점을 바꾸는 도구로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재평가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이러한 경향은, 사회정치적 행동과 정책에 실질적인 타격을 미치려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에 진실의 효용성이라는 짐을 지웠다. 일종의 문화적 로비 도구가 되어버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논픽션 영화의 임팩트 서사는 편집 과정에서 투명성을 종용당했다. 또한 보편적인 공감을 유도해야 한다는 압박은 결국 모든 상황을 밀착 관찰하는 제작 방식을 통해 캐릭터 중심의 선형적인 스토리 구조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화 제작 관행은 알렉산드라 주하즈(Alexandra Juhasz)와 앨리사 르보우(Alisa Lebow)가 그들의 에세이 「스토리 너머: 온라인 커뮤니티 기반 매니페스토 Beyond Story: An Online, Community-Based Manifesto」(2019)에서 논의한 ‘스토리의 독점(monopoly of story)’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논픽션 영화의 미학이 시장이나 다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세력의 요구에 맞춰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되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최선의 경우 이는 바로잡기에 너무 늦지 않은 놓쳐버린 기회일 뿐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이는 잘못 자리 잡은 보수주의이거나 시장 세력과 발맞추어 움직이는 매끈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검토되지 않은 단면이다. 형식 그 자체는 고유한 문화적, 정치적, 윤리적 책무이다. 우리는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고 형체 없는 것에서 형체를, 형체 있는 것에서 형체 없음을 찾아내는 과정을 찬미해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주인공, 그리고 지배적인 서사 전통만이 다큐멘터리 형식에 압력을 가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며, 그것들이 모두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기교를 산업화하고 평면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개 기득권적인 상업적 혹은 자선적 이해관계, 그리고 폐쇄적인 의도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 이어지는 장에서, 나는 영화 제작자 라에드 안도니(Raed Andoni), 롤라 아리아스(Lola Arias), 로베르토 미네르비니(Roberto Minervini), 나리만(Narimane Mari), 레모항 제레미야 모세스(Lemohang Jeremiah Mosese), 파벨 로진스키(Pawel Lozinski), 그리고 오니에카 이그웨(Onyeka Igwe)와 대화를 나누며 다큐멘터리 형식의 더 유동적인 목소리에 이 책을 개방하기에 앞서, 다큐멘터리 형식의 한계를 유지하는 다른 장벽과 힘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하이브리드적 작업들은 각각 실제 경험 속에서, 정체성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미지 속에서, 삶의 경험 속에서, 퍼포먼스 속에서, 그리고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이중성을 탐색하고, 나타내며, 추적하고, 그 흔적을 쫓는다.
이 책의 마지막 섹션에서는 인터넷 이후의 논픽션 영화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이 책에서 논의되는 내용과 형식이 단일 스크린 극장용 영화의 제작을 통해서만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몰입형이나 XR 포맷의 다큐멘터리 예술로 논의를 확장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여기에 포함된 영화 제작자들은 에키엠 바르비에(Ekiem Barbier), 기옘 코스(Guilhem Causse), 캉탱 렐구알슈(Quentin L’helgoualc’h), 사샤 리트빈테세바(Sasha Litvintseva), 베니 와그너(Beny Wagner), 리아르 리잘디(Riar Rizaldi), 테오 몬토야(Theo Montoya), 그리고 수닐 산즈기리(Suneil Sanzgiri)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하이브리드 논픽션을 넘어 내가 논바이너리 시네마라고 간주하는 형식을 지향한다. 이는 기존 다큐멘터리와 픽션 규범의 단순한 혼합도 아니고, 한 형식적 접근법이 다른 쪽의 것을 빌려온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순응하지 않는 형식들이며, 범주가 없는 영화들이다.
이 책의 서장인 『리얼을 프레이밍하기 Framing the Real』가 내가 이 책 전체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들을 배치하고 있다면, 나는 독자들이 이어지는 각 사례 연구와 에세이를 거치는 동안 이 질문들을 간직하고 운반할 수 있도록 이를 의도적으로 열어두었다. 『리얼을 유희하기 Playing the Real』와 『리얼 이후 After the Real』라는 장은 최근과 현재의 논픽션 영화 제작 사이의 구분을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리얼을 유희하기』는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 제작된 영화들을 중심으로 세 편의 에세이와 일곱 개의 사례 연구로 구성되는데, 나는 이 시기를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라고 명명된 창의적 다큐멘터리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시대정신적 자금 지원, 그리고 배급의 주류화가 이루어진 기간으로 본다.
반면 『리얼 이후』는 2020년 이후에 발표된 새로운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과 영화들을 바라본다. 나는 모든 창의적 경향이 영구적이며 서로 대화하고, 새로운 형식과 타당성, 일시성, 그리고 출현의 지리학을 발견한다고 믿기 때문에, 10년의 전환점을 ‘포스트 하이브리드(post-hybrid)’ 시기를 구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분기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리얼 이후』에서 조명된 2020년 이후의 작업들은 리얼(Real)과 함께 작업하지만 다큐멘터리나 픽션, 혹은 그 둘의 결합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는 영화의 실천들을 인정하며, 이들은 더 유동적인 시네마 스펙트럼의 언저리에서 성장한다. 그것들은 단지 완성된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보는 방식,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 그리고 리얼과 인공, 과거, 현재, 그리고 가능한 미래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제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도입글의 제목이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어지는 에세이와 인터뷰들이 이 질문을 세상을 향해 열린 창으로 옮겨 놓아, ‘다큐멘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라고 묻게 되기를 희망한다. 만약 우리가 논픽션을 선형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움직이는 성좌의 일부로 보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빛이 밝게 타오르고 폭발하며, 지평선이 사고와 시각의 새로운 영토를 드러내지만, 가장 깊은 중력과 원심력은 이미지에 대한 신뢰와 진실로서 잔존하는 영화의 우주의 일부로 본다면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결코 끝나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형식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단 한 편의 논픽션 영화는 연속적이고 틀 지어지지 않은 세계 내의 한 프레임일 뿐이며, 실제 삶과 우리가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창작물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선이듯, 제작과 수용 사이의 관계, 포착된 삶과 그 이전에 존재했고 그 장면 너머로 계속되는 삶 사이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대화하는 영화이며, 속박되지 않고, 이분법적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형성되는 잠재력을 지닌 영화다. 하지만 그에 앞서 기초적인 프레임워크를 짚어보면서, 현대적 의미의 다큐멘터리 영화 개념을 고수하게 만드는 규범과 경직성, 그리고 각종 규제적 장치들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1.2 다큐멘터리의 규율
이 장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정의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법률, 시상식, 그리고 편집 지침 등에서 쓰이는 기존의 다큐멘터리 정의들을 수집함으로써, 누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정의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제한을 만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이 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규칙과 규정은 무엇을 보존하고 보호하려 하는가? 윤리인가? 형식적 접근인가? 사실의 명료성인가? 신뢰인가? 지적재산권인가? 소위 업계의 관료들이 제시한 기존의 정의들을 탐색하면서, 이 장은 동시대 영화 제작 관행의 유동적이고 확장적인 현실이 어떻게 잘못 범주화되거나, 또는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로 쉽게 낙인찍힐 수 있는지에 대한 준거틀을 마련한다.
이 에세이 연작은 “다큐멘터리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다큐멘터리를 다른 영화 제작 형식들과 구별 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면서, 나는 이 책이 탐구하고자 하는 실천의 공간들을 열어 보이고자 한다. 곧, 경계에 존재하는 영화, “하이브리드”로 불리는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인식되어 온 한계를 넘어서는 영화를 통해, 논픽션 영화가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를 사유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나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즉, 누가 이 형식을 정의하려 하는지, 누가 그것을 특정한 한계 안에 붙잡아 두려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한계를 설정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규칙과 규제는 무엇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있는가? 윤리인가? 형식적 접근법인가? 사실적 명확성인가? 신뢰인가? 지적 재산권인가? 현재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에 관한 가장 널리 수용되는 주장은, 정의와 통제라는 이 두 가지 핵심 질문의 결합 위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논의와 배급을 통해 관습적인 응답에 도전하는 작품들을 인정할 때만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세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진보적인 논픽션 영화를 함께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 생태계에서 적용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명문화된 정의를 찾으려는 나의 탐색에서 가장 두드러진 결론은, 논픽션 영화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명시적 규칙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정의를 소위 업계의 관료들에게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동시대 영화 제작 관행의 유동적이고 확장적인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할까? 사실 창작자와 큐레이터는 언제나 대화 중이지만, 논픽션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서술한 글은 양쪽 모두에서 극히 드물다. 다큐멘터리 영화제와 기금 단체들 역시, 선정 기준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나 용어집을 가이드라인에 거의 공개하지 않으며, 그 해석은 논픽션 영화를 둘러싼 공간과 자원을 쥔 개인들의 큐레이토리얼적, 편집적 판단에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편집적 방향성 중 일부는 논픽션 스토리텔링의 정체된 양식을 축소하고, 보호하며, 정전화하고, 상업화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또 다른 일부는 경계에서 작업하는 영화 제작자들을 지원함으로써 형식을 확장하고, 질문하며, 진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은 범주화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늘려 새로운 미학적 흐름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지만, 한두 문장의 설명만으로 리얼리티 텔레비전에서 탐사 저널리즘, 시적 개인 에세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큐멘터리 스펙트럼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도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제작과 관객 사이에서 최초의 긍정적 선택자이자 게이트키퍼로 기능하는 많은 영화제들은, 엄밀한 정의 대신 태그라인(tagline) 형식의 느슨한 용어를 선호한다. 예컨대 ‘리얼리티를 예술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며 창작자의 비전을 표현하는 영화와 프로젝트’(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Amsterdam), 혹은 다큐멘터리를 ‘지식을 전달하고 성찰과 민주적 대화를 촉발하는 다층적 예술 형식이자 매개’(코펜하겐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Copenhagen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로 규정하거나, 큐레이토리얼 관점을 단순히 “논픽션의 예술” 또는 “실제의 영화”로 지칭하는 식이다.
창의적이고 확장적인 논픽션 영화의 형식들은 흔히 “경계를 밀어붙인다” 거나 “선을 흐린다”는 표현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 경계는 누가 설정했는가? 누가 그 경계를 유지하고, 왜 그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가? 나는 새로운 논픽션 영화의 창작 영역과 “경계를 확장하는” 작품들을 논할 때, 단지 이러한 범주적 경계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이 오랫동안 물려받고, 머무르며, 제작 과정 내내 씨름해온 질문들을 다시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은 대체로 윤리적이며, “리얼”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특정한 실천이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빌 니콜스는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규범화된 관습이 대부분 제도적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중립성을 추구하는 공영방송의 인터뷰 중심 균형 보도 형식, 가부장적 내레이션, 혹은 선형적 영웅 서사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전통에 적용되는 규율과 행동 강령은 논픽션 영화의 스펙트럼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윤리와 미학의 관계를 얼마나 깊이 사유할 수 있는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리얼리티 연애 방송 프로그램 〈러브 아일랜드 Love Island〉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는 감독과, 기후 변화로 위협받는 섬의 원주민을 주제로 이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이 갖는 출연자 조작(contributor manipulation)의 창작적 경계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윤리적, 도덕적 규범들은 논픽션 영화의 창작적 야망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끈단 말인가? 윤리의 제약이 논픽션과 픽션을 구분 짓는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인가? 이러한 내재적 규범들은 법과 편집 정책에 의해 더욱 경직화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공유된 금기로 작동하는가? 법적 준수가 곧 감독이 창의적으로도 순응해야 함을 의미하는가? 창작의 자유는 결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법적 윤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보호 의무(duty of care), 명예훼손(defamation), 공정성(due impartiality), 법정 모독(contempt), 비밀 촬영법(secret filming laws), 해악과 모욕(harm and offence), 상업적 민감성(commercial sensitivity) 등이다. 도덕적·윤리적 규범과 표현의 자유 간의 긴장 관계는 이 책이 다루는 동시대 논픽션 영화의 모든 사례들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구체적 질문들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 제작과 조작의 경계는 어디인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사람에게 돈을 지급해도 되는가? 위치성(positionality)은 왜 중요한가? 접근 권한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해도 되는가? 언제 서사가 착취적이게 되는가? 이국주의는 결코 긍정적일 수 없는가? 아카이브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처럼 윤리, 미학, 권력의 얽힘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와 협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 우리가 유지하는 입장들, 논픽션 영화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맺는 관계들은 화면에 드러나는 이미지들을 형성하며, 렌즈가 포착한 그 순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실제 삶들을 규정한다. 결국 우리가 논픽션 영화의 혼성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지 형식적 혼합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영화와 삶, 예술과 현실 사이를 흐르는 유동적인 통로, 즉 서로 얽히고 교차하는 관계의 공간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일련의 에세이들이 다큐멘터리와 논픽션 영화가 예술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을 조명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는 언제나 실제 인물, 사건, 장소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것은 진실과 맺는 독특한 관계 속에서 다시금 규칙, 엄밀함, 권리라는 영역 안에 놓이게 된다. 이 영역들은 종종 창작 과정에 있어 엄격한 법적, 윤리적, 저널리즘적 한계선을 설정한다. 이러한 매개변수들의 개념적 기반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논픽션 영화가 주장하는 ‘진실’이란 깨지기 쉬운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취약성은 영상 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감독의 현실 목격과 관찰 행위가 사실적 증거를 만들어내며, 관객과 결과물 이미지 사이의 신뢰 계약을 형성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 신뢰는 두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째는 이미지가 지표적(indexical)이라는 신뢰, 즉 카메라가 현실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믿음이다. 둘째는 목소리에 대한 신뢰, 즉 영화감독이나 기관이 선전이나 거짓, 숨은 의도 없이 진실된 미디어를 만든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적 신뢰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마리아 린드(Maria Lind)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그린룸』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록(document)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확실성과 검증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로 법적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확실성은 오늘날의 의식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즉, 카메라가 현실의 진실을 담보한다는 믿음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신뢰의 침식은 “습관적인 불신”, 미디어 리터러시의 향상, 그리고 선전과 이미지 조작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미지와 사실 사이의 유대가 약화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탈진실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미지를 진실로 믿는 우리의 신뢰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 형식을 법적, 정책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공영방송, 언론 정책 입안자, 기자, 그리고 보도 제작자들이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에 대한 마지막 남은 신뢰의 끈을 붙잡고, 그것을 다시 엮어내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정의하는 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화하고, 지리적 위치에 따라 상이하며, 상이함끼리 경쟁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다국적 스트리밍 플랫폼이 각기 다른 관할권과 정치적 지형 아해 배급의 헤게모니를 확장하고, 유명 시상식과 영화제 네트워크, 다큐멘터리 시장이 점점 더 글로벌화됨에 따라, 서로 다른 법적 관할과 정치적 환경 속에서 동일한 콘텐츠를 상영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또한 유명한 영화제, 시상식, 다큐멘터리 마켓들이 점점 더 글로벌 네트워크로 통합되어가면서, 결과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법적·윤리적·상업적 이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검열된다. 특정한 국가, 신념 체계, 법적 제도는 논픽션 영화를 훨씬 더 위협적인 경계 안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검열과 억압, 폭력적 선전의 형태일 수도 있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을 만들어냈다는 이유로 감독의 신체적·정신적 안녕을 위협하거나 박탈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논픽션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 예정인 작품은 이미 정의와 소유권이라는 법적 틀 속으로 내던져진다. 이때부터 영화 제작 과정에는 기만적일 정도로 창의적인 용어들이 도입되는데, 바로 ‘착취(exploitation)’, ‘권리(rights)’, ‘영역(territories)’, ‘지분(shares)’, ‘자본 참여(equity)’, ‘통제 주체(controlling entities)’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용어들은 장비들을 작동하기도 전에, 이미 법적 관계와 창작적 약속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역사상 가장 왕성한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한 명인 프레데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이 영화 제작 전에 법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정의와 전통적 한계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 제도적 관점을 비교·분석했다. 여기에는 영미권 주요 기관들이 제시한 다큐멘터리의 규제적 정의가 포함된다. 아카데미상(The Academy Awards), BBC, 영국영화협회(The British Film Institute), 그리고 영국 정부가 그 예다. 이러한 경계는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계약서의 세부 조항, 정부 정책, 시상식 부문 규정 속에 숨겨져 있다. 예컨대, 아카데미 시상식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지를 단 두 문장으로 요약해 정의한다.
1.2.1 정의
출품 자격이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란, 극장에서 개봉된 논픽션 영화로서, 문화적, 예술적, 역사적, 사회적, 과학적, 경제적 혹은 그 밖의 주제들을 창의적으로 다루는 작품으로 정의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촬영한 산물일 수도 있고, 부분적 재연, 기록 영상, 정지 이미지, 애니메이션, 스톱모션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단, 그 핵심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있어야 한다.
정의의 첫 문장은 논픽션 영화를 하나의 연출 행위이자, 실제 소재를 “창의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인정한다. 이는 다큐멘터리를 실제의 창의적 처리라고 묘사했던 1926년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의 정의 이후 한 세기 가까이 거의 발전되지 않은 것이다. 아카데미의 정의는 사실에 기반한 소재에 중점을 두는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실제 촬영분 외에 이용할 수 있는 기법들을 상세히 나열한다. 거기에는 ‘부분적’ 재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논리적 근거는 모호하며, ‘혹은 기타 주제들’로 끝나는 개방형 주제 목록과 ‘혹은 기타 기법’로 정점에 달하는 느슨하게 묘사된 형식적 접근법처럼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갖는다. 이 짧은 규정은 다큐멘터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재연은 오직 ‘부분적’이어야만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단일하고 정제된 경계선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칙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형성해온 유명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이 규칙이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의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나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의 기념비적 작업인 〈컬로든 전투 Culloden〉(1964), 〈코뮌 La Commune〉(2000),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1974) 와 같은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알제리 감독 나리만 마리(Narimane Mari)의 〈피의 콩 Bloody Beans〉(2013)와 〈미치광이들의 요새 Le Fort des Fous〉(2017) 의 경우는? 다큐멘터리에서 재연이 허용되는 비율은 얼마까지인가? 그리고 언제 그것이 허구로 간주될 만큼의 비율을 넘어서게 되는가?
아카데미 시상식의 다큐멘터리 부문은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가장 명망 있는 부문 중 하나로 꼽히지만, 동시에 이 제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가치 체계를 형성한다. 다큐멘터리는 오랫동안 덜 화려하고, 덜 상업적으로 성공적이며, 덜 주목받고, 비평적으로도 낮게 평가받는 영화 형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는 별개의 덜 두드러진 가치 및 자격 체계 내에 배치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아카데미 시상식의 기술 부문에서 후보로 오르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상식 역사 속에서 다큐멘터리가 ‘작품상(Best Picture)’ 후보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유일한 예외는 1929년,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논픽션 영화 한 편이 ‘최고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상(Best Unique and Artistic Picture)’에 후보로 올랐을 때뿐이다. 해당 부문은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폐지되고 없다. 그 영화는 바로 어니스트 B. 쇼드색(Ernest B. Schoedsack)과 메리언 C. 쿠퍼(Merian C. Cooper)가 연출한 〈창 Chang〉(1927)으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바로 다음 해에 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후 20세기 중반에 다큐멘터리가 영화보다 열등한 어떤 것으로 평가절하되던 시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토착 태국인 가족으로 구성된 출연진을 ‘영화를 본 적 없는 야생의 원주민들’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 공동체의 긍정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로도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분리는 오스카뿐 아니라 여러 국제·국내 영화 시상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물론 때때로 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시드니 마이어스(Sidney Meyers)의 〈콰이어트 원 The Quiet One〉(1948)은 최우수 다큐멘터리상뿐 아니라 각본상(Best Screenplay)에도 후보로 올랐으며, 최근에는 요나스 포어 라스무센(Jonas Poher Rasmussen)의 〈나의 집은 어디인가 Flee〉(2022)가 장편 다큐멘터리상, 장편 애니메이션, 국제영화상 세 부문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성공의 핵심은 실제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사용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며, 이는 2008년 작품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2008)이 다큐멘터리 부문 외에서도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경우와 유사하다.
다른 맥락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정의가 법적 기준으로 명시되어, 특정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영국 정부는 법인세 규정(TPC10100) 내에서 다큐멘터리를 정의하는 조항을 두고 있는데, 이 정의는 대부분의 논픽션 영화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드라마’를 설명하는 조항과 거의 동일할 만큼 혼란스럽고 모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드라마’란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 전체 또는 주된 부분이 사건(event)의 묘사로 구성되어 있을 것.
● 그 사건들은 하나 이상의 인물의 퍼포먼스(performance)를 통해 전부 또는 주로 재현될 것.
● 그 퍼포먼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대사, 연기, 노래, 춤 등을 통해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행위를 포함할 것.
드라마는 허구적 사건에 기초할 수도 있고, 비허구적 사건에 기초할 수도 있다.
해당 문서는 이어서, 무엇이 다큐멘터리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라는 용어는 해당 법령에서 별도로 정의되어 있지 않으므로, 통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다큐멘터리는 실제 사건들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기록하려는 비허구적 프로그램이다. 어떤 프로그램이 ‘다큐-드라마(docu-drama)’일 경우, 그것은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드라마일 수도 있다. 이는 해당 프로그램이 드라마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극적 장면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이 객관적이거나 사실적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프로그램이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은, 그것이 비-드라마적(non-drama) 요소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우 낮다.
범주적 구조를 형성하려는 법률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는 제작 전략 차원에서 인터-시네마에 위치한 실천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스펙트럼을 사유하게 하는 다수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예컨대 비-드라마(non-drama)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의 ‘통상적 의미(common meaning)’란 무엇인가? 퍼포먼스(performance)와 실제성(actuality)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놓이는가? 정부 차원의 다큐멘터리 정의를 논할 때, 표현의 자유와 진실을 말할 자유가 국가별 법적 관할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앞서 언급한 바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증거로서의 진실(evidential truth)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법적 틀은, 기록하고, 측정하고, 지도화하며, 알고, 통제하려는 인식론적 지배의 추구라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기록하려는 식민지적 명령, 프로파일링이라는 형사 사법 체계, 분류를 요구하는 과학적 명령과 맞닿아 있다.
공영 방송 텔레비전의 영역에서 다큐멘터리는 흔히 ‘팩추얼 텔레비전(factual television)’ 또는 ‘비각본(unscripted)’라는 동의어로 불리며, 정보 전달의 ‘정확성(accuracy)’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한다. 영국의 공영 방송사 BBC의 경우,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제작 기법(production techniques)’에 관한 창작적 제약으로까지 확장된다. BBC 가이드라인 3.3.22항은 논픽션 콘텐츠를 규정하기 위한 여러 기준을 제시하는데, 우선 영화적 문서를 제작하는 데 있어 기술(craft)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즉, “명확성과 흐름을 개선하거나 콘텐츠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등, 내용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강하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서 특히 논쟁적인 방식은 정체성이 덜 명확하거나, 극화(dramatisation), 재연(re-enactment), 재구성(reconstruction), 혹은 수행적(performance-based) 기법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제작 방식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사전 고지가 요구되는데, 이는 관객에게 실제성(actuality)과 극적 해석(dramatic interpretation) 사이에 선이 존재함을 분명히 인지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적 정확성에 관한 규칙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형식적 접근을 규정하도록 만드는 구조는, 영국 공영방송 BBC의 편집 가이드라인 속에 깊이 내장되어 있다. 가이드라인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서사의 현실이나 사건에 대해 관객을 실질적으로 오도할 수 있는 제작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뉴스, 팩추얼, 그리고 일부 팩추얼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경우, 관객에게 명확히 고지되거나 재구성(reconstruction)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즉, 이야기나 서사의 전개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행동이나 사건을 연출하거나 재연해서는 안 된다.’ 재구성이라는 창작 기법에 대해서는, 관찰된 현실의 세계와 재연된 세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요구가 뒤따른다. ‘재구성은 말이나 시각적 표식, 혹은 슬로 모션이나 색 보정과 같은 시각·청각적 단서를 통해 식별 가능해야 한다. 관객에게 재구성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따라서 재구성이 포함되는 경우, 그것은 역사적 지시대상(referent)과의 근접성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범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다면 마술적 리얼리즘 작업은 이러한 가이드라인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질 수 있을까? 혹은 트라우마를 퍼포먼스나 집단적, 신체적 기억을 통해 다루기 위해 재구성 그 자체를 창작 행위로 기록하는 최근의 작품들, 예컨대 〈우퇴위아 재구성하기 Reconstructing Utoya〉(2018)나 〈뗏목 The Raft〉(2018)과 같은 작업들은 이 기준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까?
위조, ‘관객을 오도하는 행위’, 정확성에 관한 법적 함의는 다큐멘터리 정책의 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진실과 허구 사이의 결정적 경계선은 양쪽 모두에서 창작 과정을 옥죄는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논픽션 영화가 재구성과 같은 허구적 장치를 사용할 때 이를 명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라마 또한 사실에 근거한 경우에는 민감성, 명확화, 그리고 원천 증거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준법 감시에 대한 BBC의 편집 정책은 드라마에서도 공정성과 정확성을 요구한다. ‘드라마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할 경우, 일부 극적 요소가 허구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가능한 한 충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에 기초해야 하며, 연대기 등 이미 알려진 사실을 과도하게 왜곡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드라마와 논픽션 사이의 법적 경계선은 영화 제작자들의 관행 위반과 모호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점점 더 도전받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Baby Reindeer〉(2024)를 둘러싼 최근의 소송은, 작품을 극화와 드라마2 사이 어디에 두는지에 대한 창작자의 모호한 태도와 얽혀 있다.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피오나 하비(Fiona Harvey)는 현재 제작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상태다. 이 법적 혼선의 한 원인은 작품 도입부에 “이것은 실화다(This is a true story)”라는 문구를 사용한 데 있다. 이는 통상적인 법적 거리두기 표현인 “실화에 기반함(Based on a true story)”과는 다르다. 이후 창작자이자 주연인 리처드 개드(Richard Gadd)는 법원 제출 문서에서 이 문구를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시리즈는 극적 작품(dramatic work)이다. 다큐멘터리도, 리얼리즘을 시도한 것도 아니다. 내 삶과 실제 사건들에 기반하고 감정적으로는 진실이지만, 이는 사건과 감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허구화되었으며 실제 사실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없다.” 이 판결의 결과는, 진실과 허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규정하는 언어 사이에 더 큰 법적·창작적 거리를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영화가 현실을 제시하고 있는지, 아니면 느슨한 형태의 황홀경 혹은 개인적인 진실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 제작된다면 무엇을 잃게 될까?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의 날카로운 에세이 「현실-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2017)는, 탈진실의 흐릿한 공간을 조장하는 것이 미디어 형식 전반에 대한 신뢰, 그리고 진실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더욱 붕괴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문제 삼는다. 발솜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영화는 공격받는 현실(embattled real)과 어떤 방식으로 회복적(reparative)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그리고 또 말한다. ‘사실과 허구의 구별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현실이 붕괴했다고 공황적으로 선언하는 태도는, 때로는 현실의 붕괴를 더욱 가속할 뿐 거의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그는 영화 형식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면, 유동적인 영화는 논픽션 이미지에 대한 집단적 신뢰를 더욱 훼손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과의 재접속을 향한 새로운 진보적 관찰 다큐멘터리 흐름을 언급한다. 특히 하버드 감각민족지학 랩(Harvard Sensory Ethnography Lab)과 연관된 영화 제작자들 예컨대 J. P. 스니아데키(J. P. Sniadecki)의 〈철의 나라 The Iron Ministry〉(2014), 베레나 파라벨(Verena Paravel)과 루시앙 캐스팅-테일러(Lucien Casta-ing Taylor)의 〈리바이어던 Leviathan〉(2012), 스테파니 스프레이(Stephanie Spray)와 파초 벨레스(Pacho Velez)의 〈마나카마나 Manakamana〉(2013)이 그 사례로 제시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규정하려는 영화제와 시상 제도, 법적·편집적 정책의 구조들은, 이 비교적 젊은 예술 형식이 변화하는 현실과 이미지·사운드 포착 기술의 변화에 대응하려 애쓰는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현실을 심문하고, 층위화하며, 구조화하는 방식을 통해 그러한 변화하는 관계들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들은 논픽션 영화에 대한 확장된 비전을 제시하며, 진실과 맺는 취약한 관계를 유희하고 이를 사유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발솜이 강조하는 것처럼 이들이 현실-기반 예술의 힘을 더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1.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Rules and Eligibility, https://www.oscars.org/oscars/rules-eligibility
2. Erika Balsom, “The Reality-Based Community”, e-flux journal, no. 83 (June 2017), online
https://www.e-flux.com/journal/83/142332/the-reality-based-community
3. BBC Editorial Guidelines, https://www.bbc.com/editorialguidelines/guidelines
4. Stella Bruzzi, New Documentary: A Critical Introduction (London: Routledge, 2000).
5. John Corner, The Art of Record: A Critical Introduction to Documentary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6).
6. John Grierson, “Contact”, Cinema Quarterly, vol. 2, no. 1 (Autumn 2007), 47.
7. Alexandra Juhasz and Alisa Lebow, “Beyond Story; An Online, Community-Based Manifesto”, World Records Journal, vol. 2, (November 2018). https://worldrecordsjournal.org/beyond-story-an-online-community-based-manifesto/
8. Maria Lind and Hito Steyerl, The Green Room: Reconsidering the Documentary and
Contemporary Art #1 (New York: Stenberg Press, 2008).
9. Bill Nichols, Introduction to Documentary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0).
10. Carl Plantiga, “What a Documentary Is, After All”,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vol. 63, no. 2, 105-117.
원본 도서 Hybrid Documentary and Moving Image
by Luke W. Moody
Routledge
2025
1장 ‘리얼(Real)’을 프레이밍하기1
1.1 우리가 ‘논픽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오늘날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탐색하며 시작한다. 동시에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극영화로부터 스스로의 경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서두는 이 책의 핵심 의도를 개괄한다. 즉, 동시대 논픽션 영화의 다의성을 고찰하고, 이후의 장들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울리게 될 핵심 질문들을 제시한다. 이 장은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 혹은 논바이너리 시네마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조건과 배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해석을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산되는 현실과 긴밀히 맞물려 변화해 온 용어들과 연결시킨다. 이 장은 이렇게 묻는다. 진실(truth), 혹은 진실들(truths), 혹은 현실들(realities)을 재현하기 위해 그 ‘경계선’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책의 마지막 장을 닫은 이후에도 짧은 에세이와 사례 연구 사이에서 공명하며 확장될 하나의 질문으로 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논픽션 영화(non-fiction cinema)’라고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책의 중심 목적은 동시대 논픽션 영화의 다의성(polysemy)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 책은 수많은 영화감독의 목소리, 영화에 대한 서술, 그리고 쏟아지는 질문들을 모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서 영화 제작을 사유한다. 여기서 우리가 공유하는 현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처리하는 예술은 취약하지만 나날이 팽창하는 가능성을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논픽션 영화의 확장적이고 하이브리드적인 형식(hybrid forms)을 탐구하기 앞서, 나는 먼저 기존의 정의들과 학문적 제약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규제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즉, 논픽션과 픽션을 구분 짓는 매개변수(parameter)는 무엇인가? 진실, 혹은 다수의 진실, 또는 현실들을 묘사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그 경계선은 과연 어떤 형태인가?
질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이 연구의 기점인 나 자신의 위치성(positionality)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인정하고자 한다. 나는 영국 다큐멘터리 산업에서 대부분의 경력을 쌓아온 백인 남성이며, 유럽식 교육을 받았고, 주로 자국 내 미디어 생태계 속에서 영화를 관람해왔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전에 몰랐던 예술가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을 탐구할 기회를 얻었지만, 나의 시야는 지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참고 작품들, 그리고 대부분 영국 및 유럽의 영화제에서 접할 수 있었던 작품들로 제한되어 있다. 이 책의 논의를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포맷이라는 광범위한 영역 안에 집중하기 위해, 내가 이 글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작품은 장편 다큐멘터리(feature-length documentary)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특정 형식은 자원과 재현의 측면에서 배타적이었으며, 20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식민적이고 착취적인 권력, 서사, 제작, 관객성의 형태를 거리낌 없이 유지해왔다.
따라서 나는 논픽션 영화 내의 보다 다원적인 목소리를 사유하고자 심층 논의의 시간적 범위를 최근의 제작 시기로 한정했다. 사례 연구들은 2011년부터 2024년 사이에 발표된, 최근의 기억 속에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다. 21세기 영화감독들의 작업에 집중함으로써 나는 논픽션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자 하며, 동시에 이 책 너머에서 탐구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역사적 작품들과의 연속적인 맥락 또한 함께 탐색하고자 한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의 역사나 계보를 기록하거나 정리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다만 그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특정한 순간들과 작품들 (어떤 것은 널리 알려졌고, 어떤 것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인용하며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영화사에는 수많은 리좀(rhizome)들이 존재하여 끊임없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논픽션 영화의 새로운 형태를 틔워내고 있다. 이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영화, 실험 영화, 투쟁(militant) 영화, DIY, 그리고 사적 영화라는 새로운 접선의 운동들을 재정립하고 형성한다.
이 책에 인용된 작품들은 가장 유명하거나 널리 배급된 영화가 아닐 수 있으며, 기술적인 완성도 또한 높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에 결함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상상력과 제작(production)이 충돌하는 마찰의 공간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고 반추하는 가장 흥미로운 제안들 중 일부가 탄생한다. 단순한 완성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유희하고 공유하려는 태도, ‘아름다운 의도의 증거로서 불완전함(imperfection as evidence of beautiful intention)’으로부터 말이다. 이 책에 포함된 많은 작품들은 전통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분류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20세기적 명명법으로서의 ‘다큐멘터리’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무빙이미지 작업(moving image artwork)’, ‘시네마’, 혹은 장르의 이름을 따라 ‘호러’, ‘스릴러’, ‘SF’ 등의 명칭으로 불린다. 아마도 존 코너(John Corner)가 『The Art of Record: A Critical Introduction to Documentary 기록의 예술: 다큐멘터리에 대한 비판적 입문』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이해할 때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인가?”라고 묻는 것보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적 프로젝트인가?”라고 묻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이러한 영화의 유형화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처음부터 복잡한 형세를 이루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스코틀랜드의 영화감독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은 다큐멘터리를 ‘현실의 창조적 처리(creative treatment of reality)’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리얼리티(reality)란, 이미 그 자체로 모든 사람들 (감독이든, 시민이든, 제도이든, 예술가이든)이 함께 관여하는 창조적 과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창조적이지 않은 리얼리티의 처리는 어떤 양상을 띠고 있을까?
우리가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방식은 대부분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규범, 신념과 교리, 정치 체제 등을 거쳐, 최근에는 상업적 스크린 기술과 플랫폼을 매개로 하여 리얼리티를 인식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작가와 감독들이 무빙 이미지(moving images)를 가지고 어떻게 유희하며 리얼리티의 이미지를 조직하는지에 대한 사유는 우리 모두가 현재와 앞으로의 리얼리티를 집단적으로 탐색하고, 형성하며, 통제하고, 또 그 리얼리티를 희망하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만큼만 깊어질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만약 ‘픽션’이 영화적 항해 속에서 우연을 배제하고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존 그리어슨의 ‘다큐멘터리’는 의식있는 목격자이자, 왜곡된 요술 거울(fun house mirror)일 것이다.
사실 그리어슨이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개념화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이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이분법은 1895년 영화의 탄생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창조적 다큐멘터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많은 작품들은 영화가 탄생한 후 약 30년, 즉 경계가 모호한 과도기에 존재했던 영화 예술의 성장기 속에서 제작되었다. 100년도 더 된 이 초기의 영화들은 리얼리티를 다루기 위해 인공적인 이미지 구성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로버트 J. 플래허티(Robert J. Flaherty)의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는 연출과 연기를 통해 북극 지역 이누크 사냥꾼의 삶의 초상을 그렸다.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키노 아이 Kino-Eye〉(1924)는 소비에트 농촌 마을의 삶을 실험적 촬영기법과 함께 만화경처럼 구성한 시각적 교향시였다. 벤야민 크리스텐센(Benjamin Christensen)의 〈마녀들 Häxan〉(1922)은 사실적 텍스트와 연구, 그리고 극화와 삽화를 결합해 마법과 신비주의의 역사를 탐구했다. 그리고 한스 발터 콘블룸(Hanns Walter Kornblum), 루돌프 비브라흐(Rudolf Biebrach), 요하네스 마이어(Johannes Meyer)의 〈우리의 천체 Our Heavenly Bodies〉(1925)는 관찰된 풍경, 외계적 모형, 그리고 극화된 사변적 우주 탐사 사이를 오가며, 당시 인류가 알고 있던 우주의 지식과 알려진 미지의 영역(known unknowns)을 보여주었다.
이후 100년에 걸쳐, 다큐멘터리라는 논픽션 예술 형식은 형태를 빚고, 경계를 흐리고, 때로는 부수며, 확장하고, 다시 수축하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그러면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될 수 없는가’를 고정시키려는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는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존재하기 되는지를 묻는 시도보다 훨씬 빈번했다. 다큐멘터리를 픽션과 구분되는 독립된 영화 형식으로 명명함으로써 발생한 이분법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큐멘터리의 핵심 가치와 이해를 형성한 정전적(canonical) 영화들의 계보를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주변부의 영화들(peripheral cinema) 역시 탄생시켰다. 이는 각 시대가 규정한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의 개념적 한계치, 즉 그 경계와 틈새에서 작동하며 분류의 절벽이나 중첩된 지점에 침투하고 간섭하는 다큐멘터리들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 연구자 빌 니콜스(Bill Nichols)는 아마도 최근 가장 널리 인용되는 다큐멘터리 제작 양식의 분류 작업을 수행한 작가일 것이다. 그는 2001년 출간한 저서 『다큐멘터리 입문 Introduction to Documentary』에서 다큐멘터리의 주요한 양식으로 시적(poetic), 설명적(expository), 관찰적(observational), 상호작용/참여적(interactive/participatory), 성찰적(reflexive), 수행적(performative) 양식을 제시했다. 니콜스는 다큐멘터리가 시간에 따라 진화하고, 경계가 유동적인 형식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픽션과 논픽션 영화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함을 지적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벤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는데, 각 원의 중첩 부분에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 다큐드라마(docudrama), 사실 기반 재연(true-to-life re-enactment) 영화와 같이 상이한 두 영역 사이의 구분을 통상적으로 유지하는 운동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인터-시네마(inter-cinema)’의 공간을 제안하는 대신, 유동적인 시네마(fluid cinema)라는 개념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범주들은 동시에, 뚜렷하게 다른 두 가지의 영화 형식 사이의 혼성성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일부는 다큐멘터리이면서 일부는 드라마이고, 일부는 그 형식에 대한 풍자이며, 일부는 재연(enactment)이고, 일부는 재현적 극화(representative dramatisation)인 것이다.
심지어 다큐멘터리 상영과 배급을 담당하는 이들조차 이러한 이중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특히 방송 다큐멘터리 영역에서는 다양한 장르가 서로의 내용을 뒤섞으며 ‘사실 기반 엔터테인먼트(factual entertainment)’, ‘구성된 리얼리티(constructed reality)’, 혹은 ‘비각본(unscripted)’ 같은 모순적인 범주 아래 묶이곤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마치 모든 논픽션 영상 작업이 각본 없는 방식을 포함하지 않는 생산 방식인 양 제시된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는 ‘도피성 리얼리티 TV(escapist reality TV)‘라는 플랫폼 카테고리를 활용하는데, 이는 현실적 상황에 오락적 요소를 주입하려는 욕망의 역설적 표현이다. 한편, CPH:DOX(코펜하겐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유사-픽션(para-fictions)이라는 섹션을 운영하며, 비전문 배우들이 사전에 설정된 시나리오 속에서 즉흥적인 자전적-픽션(auto-fiction)을 펼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21세기 들어 대중 담론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바라보는 인식을 확장시키며, 영화감독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의 다양한 버전들, 즉 그것을 구성하고 시각화하며 만들어내는 주관적 제작 방식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빌 니콜스는 2010년에 출간된 『다큐멘터리 입문』 제2판에서 2001년 초판의 분류 체계를 보완했다. 그는 서문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관계를 설명하며, 겉보기에는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는 두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다루는 것”, 다른 하나는 “감독이 상상해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이 두 범주의 차이가 결코 절대적인 분리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각 영화 형식은 서로의 영역에서 표현 기법과 창작 방법을 차용하거나 모방하거나 변용하며, 따라서 “두 세계의 경계는 매우 유동적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전히 인식 가능한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니콜스가 말하는 그 ‘경계’란 정확히 무엇이며, 그가 궁극적으로 인식 가능한 차이로 지목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칼 플란티가(Carl Plantinga)는 그의 에세이 「결국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What Is Documentary After All」(2005)에서 진실성(veridicality)을 결정적 기준으로 제시한다. 니콜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진실한 재현(veridical representation)’의 관습 또한 역사에 따라 변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허구화의 행위가 논픽션 영화의 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해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장면의 연출과 재연은 다큐멘터리 역사 첫 65년 동안 일상적이며 정당한 제작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티가는 여전히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 사이의 경계선이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그 차이는 경우에 따라 미묘하고 복합적일 수 있다. 그는 “예컨대 순전히 허구적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연기를 ‘진실한 재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배우가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다면, 그들의 복장, 대사, 행동이 충분한 연구에 기반하여 역사적 정확성을 갖춘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진실된 재현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빌 니콜스의 저작과 함께 언급되는 스텔라 브루지(Stella Bruzzi)의 기념비적 저서 『신다큐멘터리 New Documentary』(2000)는 밀레니엄 시대에 발표되었으며, 논픽션 영화에서 위치성과 자기반성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를 촉구했다. 그는 모든 영화 제작이 본질적으로 구성된 행위이며, 그것이 기록물에 미치는 영향을 전면에 내세웠다. 브루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결코 단순히 현실을 재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현실 공간과 그 공간에 개입하는 영화감독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퍼포먼스는 언제나 다큐멘터리 제작의 핵심에 있어 왔지만, 위조(falsification)와 허구화라는 함의를 지닌다는 이유로 의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특성들은 전통적으로 논픽션이 추구하는 바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작가성(authorship), 퍼포먼스, 그리고 개입을 논픽션 영화 제작의 별도 양식으로 분류하려 했던 이전의 시도들과 달리, 브루지는 다큐멘터리를 오직 “다큐멘터리 제작자, 기록 기술, 그리고 출연자 사이의 만남에 대한 기록”으로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다큐멘터리는 재현에 있어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만남이자, 상호작용의 산물이었다. 브루지는 다음과 같이 쓴다. “감독의 명시적인 개입은 영화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단호한 질문으로 인해 ‘편향되지 않은 영화(unbiased film)’라는 다큐멘터리 이론의 이상이 끝났음을 드러낸다. 즉, 다큐멘터리란 제작진이 도착하기 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의 도착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해버린 상황과 영화 제작자, 제작진 사이의 대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협업적 구성의 문제는 아래에서 재수록되고 개정된 나의 에세이 「리얼을 함께 만들기 Making It Real Together」에서 더욱 깊이 탐구될 것이다.
여기서 논픽션 영화에 대한 다의적인(polysemic) 개념을 제시하는 나의 의도가 결코 느슨하고 상대적인 담론의 장으로 빠지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은 「현실-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2017)에서 관찰적 영화와 책임 있는 논픽션 제작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녀는 가짜 뉴스, 인공지능 딥페이크, 붕괴하는 저널리즘 생태계로 특징지어지는 ‘탈진실(post-truth)’ 시대 속에서 공유된 진실의 개념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영화의 더 다원적인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진실과 맺는 관계가 취약하고,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으며, 해체보다는 더 세밀한 분화가 필요한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정서 또한 공유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다큐멘터리 이미지에 대한 신뢰가 영화 발명 이래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 놓여 있는 시대에 글을 쓰고 있으며, 또한 이 책에서 논의되는 영화들이 ‘진실’을 제시함에 있어 덜 직접적이거나 덜 재현적인 방식을 취함으로써, 논픽션 영화의 사실적 토대를 재확인하는 데 위험 요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마리아 린드(Maria Lind)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이 『그린룸: 다큐멘터리와 동시대 미술에 관한 재고 The Greenroom: Reconsidering the Documentary and Contemporary Art』(2008)(이하 ‘그린룸’)의 서문에서 지적하듯, ‘이중 구속은 강력하다. 한편으로 다큐멘터리 이미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큐멘터리의 재현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 이 에세이들의 의도는 논픽션 시네마에 대한 신뢰를 더 말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내어 의미와 가능성, 그리고 이미지 리터러시를 다시 끌어들이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연관된 사실성이라는 요소는 그 짧은 역사 동안 형식적 실험의 가능성에 다양한 제약과 기대, 그리고 부담을 지워왔다. 다큐멘터리가 정보의 유통과 동일시되면서, 그 방향성이 픽션 작업보다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이데올로기적 틀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20세기를 거치며 국가적, 국제적으로 조정된 다양한 선전 활동에 봉사하거나, 연대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더 최근에는 이 매체를 통해 관객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제3섹터 기구들과 자선가들의 가치 체계에 의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개인적 관점을 바꾸는 도구로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재평가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이러한 경향은, 사회정치적 행동과 정책에 실질적인 타격을 미치려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에 진실의 효용성이라는 짐을 지웠다. 일종의 문화적 로비 도구가 되어버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논픽션 영화의 임팩트 서사는 편집 과정에서 투명성을 종용당했다. 또한 보편적인 공감을 유도해야 한다는 압박은 결국 모든 상황을 밀착 관찰하는 제작 방식을 통해 캐릭터 중심의 선형적인 스토리 구조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화 제작 관행은 알렉산드라 주하즈(Alexandra Juhasz)와 앨리사 르보우(Alisa Lebow)가 그들의 에세이 「스토리 너머: 온라인 커뮤니티 기반 매니페스토 Beyond Story: An Online, Community-Based Manifesto」(2019)에서 논의한 ‘스토리의 독점(monopoly of story)’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논픽션 영화의 미학이 시장이나 다른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세력의 요구에 맞춰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되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최선의 경우 이는 바로잡기에 너무 늦지 않은 놓쳐버린 기회일 뿐이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이는 잘못 자리 잡은 보수주의이거나 시장 세력과 발맞추어 움직이는 매끈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검토되지 않은 단면이다. 형식 그 자체는 고유한 문화적, 정치적, 윤리적 책무이다. 우리는 기존의 형식을 거부하고 형체 없는 것에서 형체를, 형체 있는 것에서 형체 없음을 찾아내는 과정을 찬미해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주인공, 그리고 지배적인 서사 전통만이 다큐멘터리 형식에 압력을 가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며, 그것들이 모두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다큐멘터리의 기교를 산업화하고 평면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개 기득권적인 상업적 혹은 자선적 이해관계, 그리고 폐쇄적인 의도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 이어지는 장에서, 나는 영화 제작자 라에드 안도니(Raed Andoni), 롤라 아리아스(Lola Arias), 로베르토 미네르비니(Roberto Minervini), 나리만(Narimane Mari), 레모항 제레미야 모세스(Lemohang Jeremiah Mosese), 파벨 로진스키(Pawel Lozinski), 그리고 오니에카 이그웨(Onyeka Igwe)와 대화를 나누며 다큐멘터리 형식의 더 유동적인 목소리에 이 책을 개방하기에 앞서, 다큐멘터리 형식의 한계를 유지하는 다른 장벽과 힘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하이브리드적 작업들은 각각 실제 경험 속에서, 정체성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미지 속에서, 삶의 경험 속에서, 퍼포먼스 속에서, 그리고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이중성을 탐색하고, 나타내며, 추적하고, 그 흔적을 쫓는다.
이 책의 마지막 섹션에서는 인터넷 이후의 논픽션 영화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이 책에서 논의되는 내용과 형식이 단일 스크린 극장용 영화의 제작을 통해서만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몰입형이나 XR 포맷의 다큐멘터리 예술로 논의를 확장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여기에 포함된 영화 제작자들은 에키엠 바르비에(Ekiem Barbier), 기옘 코스(Guilhem Causse), 캉탱 렐구알슈(Quentin L’helgoualc’h), 사샤 리트빈테세바(Sasha Litvintseva), 베니 와그너(Beny Wagner), 리아르 리잘디(Riar Rizaldi), 테오 몬토야(Theo Montoya), 그리고 수닐 산즈기리(Suneil Sanzgiri)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하이브리드 논픽션을 넘어 내가 논바이너리 시네마라고 간주하는 형식을 지향한다. 이는 기존 다큐멘터리와 픽션 규범의 단순한 혼합도 아니고, 한 형식적 접근법이 다른 쪽의 것을 빌려온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순응하지 않는 형식들이며, 범주가 없는 영화들이다.
이 책의 서장인 『리얼을 프레이밍하기 Framing the Real』가 내가 이 책 전체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들을 배치하고 있다면, 나는 독자들이 이어지는 각 사례 연구와 에세이를 거치는 동안 이 질문들을 간직하고 운반할 수 있도록 이를 의도적으로 열어두었다. 『리얼을 유희하기 Playing the Real』와 『리얼 이후 After the Real』라는 장은 최근과 현재의 논픽션 영화 제작 사이의 구분을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리얼을 유희하기』는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 제작된 영화들을 중심으로 세 편의 에세이와 일곱 개의 사례 연구로 구성되는데, 나는 이 시기를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라고 명명된 창의적 다큐멘터리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시대정신적 자금 지원, 그리고 배급의 주류화가 이루어진 기간으로 본다.
반면 『리얼 이후』는 2020년 이후에 발표된 새로운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과 영화들을 바라본다. 나는 모든 창의적 경향이 영구적이며 서로 대화하고, 새로운 형식과 타당성, 일시성, 그리고 출현의 지리학을 발견한다고 믿기 때문에, 10년의 전환점을 ‘포스트 하이브리드(post-hybrid)’ 시기를 구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분기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리얼 이후』에서 조명된 2020년 이후의 작업들은 리얼(Real)과 함께 작업하지만 다큐멘터리나 픽션, 혹은 그 둘의 결합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는 영화의 실천들을 인정하며, 이들은 더 유동적인 시네마 스펙트럼의 언저리에서 성장한다. 그것들은 단지 완성된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보는 방식,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 그리고 리얼과 인공, 과거, 현재, 그리고 가능한 미래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제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도입글의 제목이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다큐멘터리라고 불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어지는 에세이와 인터뷰들이 이 질문을 세상을 향해 열린 창으로 옮겨 놓아, ‘다큐멘터리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라고 묻게 되기를 희망한다. 만약 우리가 논픽션을 선형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움직이는 성좌의 일부로 보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빛이 밝게 타오르고 폭발하며, 지평선이 사고와 시각의 새로운 영토를 드러내지만, 가장 깊은 중력과 원심력은 이미지에 대한 신뢰와 진실로서 잔존하는 영화의 우주의 일부로 본다면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결코 끝나지 않는 영화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형식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단 한 편의 논픽션 영화는 연속적이고 틀 지어지지 않은 세계 내의 한 프레임일 뿐이며, 실제 삶과 우리가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창작물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선이듯, 제작과 수용 사이의 관계, 포착된 삶과 그 이전에 존재했고 그 장면 너머로 계속되는 삶 사이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대화하는 영화이며, 속박되지 않고, 이분법적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형성되는 잠재력을 지닌 영화다. 하지만 그에 앞서 기초적인 프레임워크를 짚어보면서, 현대적 의미의 다큐멘터리 영화 개념을 고수하게 만드는 규범과 경직성, 그리고 각종 규제적 장치들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1.2 다큐멘터리의 규율
이 장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정의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법률, 시상식, 그리고 편집 지침 등에서 쓰이는 기존의 다큐멘터리 정의들을 수집함으로써, 누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정의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제한을 만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이 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규칙과 규정은 무엇을 보존하고 보호하려 하는가? 윤리인가? 형식적 접근인가? 사실의 명료성인가? 신뢰인가? 지적재산권인가? 소위 업계의 관료들이 제시한 기존의 정의들을 탐색하면서, 이 장은 동시대 영화 제작 관행의 유동적이고 확장적인 현실이 어떻게 잘못 범주화되거나, 또는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로 쉽게 낙인찍힐 수 있는지에 대한 준거틀을 마련한다.
이 에세이 연작은 “다큐멘터리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다큐멘터리를 다른 영화 제작 형식들과 구별 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면서, 나는 이 책이 탐구하고자 하는 실천의 공간들을 열어 보이고자 한다. 곧, 경계에 존재하는 영화, “하이브리드”로 불리는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인식되어 온 한계를 넘어서는 영화를 통해, 논픽션 영화가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를 사유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나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즉, 누가 이 형식을 정의하려 하는지, 누가 그것을 특정한 한계 안에 붙잡아 두려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한계를 설정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규칙과 규제는 무엇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있는가? 윤리인가? 형식적 접근법인가? 사실적 명확성인가? 신뢰인가? 지적 재산권인가? 현재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에 관한 가장 널리 수용되는 주장은, 정의와 통제라는 이 두 가지 핵심 질문의 결합 위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논의와 배급을 통해 관습적인 응답에 도전하는 작품들을 인정할 때만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세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진보적인 논픽션 영화를 함께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 생태계에서 적용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명문화된 정의를 찾으려는 나의 탐색에서 가장 두드러진 결론은, 논픽션 영화를 엄격하게 규정하는 명시적 규칙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정의를 소위 업계의 관료들에게서 찾아야 할까, 아니면 동시대 영화 제작 관행의 유동적이고 확장적인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할까? 사실 창작자와 큐레이터는 언제나 대화 중이지만, 논픽션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서술한 글은 양쪽 모두에서 극히 드물다. 다큐멘터리 영화제와 기금 단체들 역시, 선정 기준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나 용어집을 가이드라인에 거의 공개하지 않으며, 그 해석은 논픽션 영화를 둘러싼 공간과 자원을 쥔 개인들의 큐레이토리얼적, 편집적 판단에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편집적 방향성 중 일부는 논픽션 스토리텔링의 정체된 양식을 축소하고, 보호하며, 정전화하고, 상업화하는 데 기여하는 반면, 또 다른 일부는 경계에서 작업하는 영화 제작자들을 지원함으로써 형식을 확장하고, 질문하며, 진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은 범주화의 경계를 탄력적으로 늘려 새로운 미학적 흐름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지만, 한두 문장의 설명만으로 리얼리티 텔레비전에서 탐사 저널리즘, 시적 개인 에세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큐멘터리 스펙트럼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도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제작과 관객 사이에서 최초의 긍정적 선택자이자 게이트키퍼로 기능하는 많은 영화제들은, 엄밀한 정의 대신 태그라인(tagline) 형식의 느슨한 용어를 선호한다. 예컨대 ‘리얼리티를 예술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며 창작자의 비전을 표현하는 영화와 프로젝트’(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Amsterdam), 혹은 다큐멘터리를 ‘지식을 전달하고 성찰과 민주적 대화를 촉발하는 다층적 예술 형식이자 매개’(코펜하겐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Copenhagen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로 규정하거나, 큐레이토리얼 관점을 단순히 “논픽션의 예술” 또는 “실제의 영화”로 지칭하는 식이다.
창의적이고 확장적인 논픽션 영화의 형식들은 흔히 “경계를 밀어붙인다” 거나 “선을 흐린다”는 표현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 경계는 누가 설정했는가? 누가 그 경계를 유지하고, 왜 그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는가? 나는 새로운 논픽션 영화의 창작 영역과 “경계를 확장하는” 작품들을 논할 때, 단지 이러한 범주적 경계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이 오랫동안 물려받고, 머무르며, 제작 과정 내내 씨름해온 질문들을 다시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들은 대체로 윤리적이며, “리얼”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특정한 실천이나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빌 니콜스는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규범화된 관습이 대부분 제도적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중립성을 추구하는 공영방송의 인터뷰 중심 균형 보도 형식, 가부장적 내레이션, 혹은 선형적 영웅 서사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전통에 적용되는 규율과 행동 강령은 논픽션 영화의 스펙트럼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윤리와 미학의 관계를 얼마나 깊이 사유할 수 있는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리얼리티 연애 방송 프로그램 〈러브 아일랜드 Love Island〉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는 감독과, 기후 변화로 위협받는 섬의 원주민을 주제로 이들과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이 갖는 출연자 조작(contributor manipulation)의 창작적 경계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윤리적, 도덕적 규범들은 논픽션 영화의 창작적 야망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끈단 말인가? 윤리의 제약이 논픽션과 픽션을 구분 짓는 본질적 특성 중 하나인가? 이러한 내재적 규범들은 법과 편집 정책에 의해 더욱 경직화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공유된 금기로 작동하는가? 법적 준수가 곧 감독이 창의적으로도 순응해야 함을 의미하는가? 창작의 자유는 결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법적 윤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보호 의무(duty of care), 명예훼손(defamation), 공정성(due impartiality), 법정 모독(contempt), 비밀 촬영법(secret filming laws), 해악과 모욕(harm and offence), 상업적 민감성(commercial sensitivity) 등이다. 도덕적·윤리적 규범과 표현의 자유 간의 긴장 관계는 이 책이 다루는 동시대 논픽션 영화의 모든 사례들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구체적 질문들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 제작과 조작의 경계는 어디인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사람에게 돈을 지급해도 되는가? 위치성(positionality)은 왜 중요한가? 접근 권한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해도 되는가? 언제 서사가 착취적이게 되는가? 이국주의는 결코 긍정적일 수 없는가? 아카이브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처럼 윤리, 미학, 권력의 얽힘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와 협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 우리가 유지하는 입장들, 논픽션 영화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맺는 관계들은 화면에 드러나는 이미지들을 형성하며, 렌즈가 포착한 그 순간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실제 삶들을 규정한다. 결국 우리가 논픽션 영화의 혼성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단지 형식적 혼합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영화와 삶, 예술과 현실 사이를 흐르는 유동적인 통로, 즉 서로 얽히고 교차하는 관계의 공간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일련의 에세이들이 다큐멘터리와 논픽션 영화가 예술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을 조명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는 언제나 실제 인물, 사건, 장소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것은 진실과 맺는 독특한 관계 속에서 다시금 규칙, 엄밀함, 권리라는 영역 안에 놓이게 된다. 이 영역들은 종종 창작 과정에 있어 엄격한 법적, 윤리적, 저널리즘적 한계선을 설정한다. 이러한 매개변수들의 개념적 기반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논픽션 영화가 주장하는 ‘진실’이란 깨지기 쉬운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취약성은 영상 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감독의 현실 목격과 관찰 행위가 사실적 증거를 만들어내며, 관객과 결과물 이미지 사이의 신뢰 계약을 형성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 신뢰는 두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째는 이미지가 지표적(indexical)이라는 신뢰, 즉 카메라가 현실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믿음이다. 둘째는 목소리에 대한 신뢰, 즉 영화감독이나 기관이 선전이나 거짓, 숨은 의도 없이 진실된 미디어를 만든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적 신뢰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마리아 린드(Maria Lind)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그린룸』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록(document)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확실성과 검증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로 법적 영역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확실성은 오늘날의 의식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즉, 카메라가 현실의 진실을 담보한다는 믿음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신뢰의 침식은 “습관적인 불신”, 미디어 리터러시의 향상, 그리고 선전과 이미지 조작 기술의 발전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미지와 사실 사이의 유대가 약화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탈진실 사회에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미지를 진실로 믿는 우리의 신뢰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 형식을 법적, 정책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공영방송, 언론 정책 입안자, 기자, 그리고 보도 제작자들이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에 대한 마지막 남은 신뢰의 끈을 붙잡고, 그것을 다시 엮어내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정의하는 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화하고, 지리적 위치에 따라 상이하며, 상이함끼리 경쟁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다국적 스트리밍 플랫폼이 각기 다른 관할권과 정치적 지형 아해 배급의 헤게모니를 확장하고, 유명 시상식과 영화제 네트워크, 다큐멘터리 시장이 점점 더 글로벌화됨에 따라, 서로 다른 법적 관할과 정치적 환경 속에서 동일한 콘텐츠를 상영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또한 유명한 영화제, 시상식, 다큐멘터리 마켓들이 점점 더 글로벌 네트워크로 통합되어가면서, 결과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법적·윤리적·상업적 이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자체가 의도적으로 검열된다. 특정한 국가, 신념 체계, 법적 제도는 논픽션 영화를 훨씬 더 위협적인 경계 안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검열과 억압, 폭력적 선전의 형태일 수도 있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을 만들어냈다는 이유로 감독의 신체적·정신적 안녕을 위협하거나 박탈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논픽션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작 예정인 작품은 이미 정의와 소유권이라는 법적 틀 속으로 내던져진다. 이때부터 영화 제작 과정에는 기만적일 정도로 창의적인 용어들이 도입되는데, 바로 ‘착취(exploitation)’, ‘권리(rights)’, ‘영역(territories)’, ‘지분(shares)’, ‘자본 참여(equity)’, ‘통제 주체(controlling entities)’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용어들은 장비들을 작동하기도 전에, 이미 법적 관계와 창작적 약속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역사상 가장 왕성한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한 명인 프레데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이 영화 제작 전에 법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정의와 전통적 한계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 제도적 관점을 비교·분석했다. 여기에는 영미권 주요 기관들이 제시한 다큐멘터리의 규제적 정의가 포함된다. 아카데미상(The Academy Awards), BBC, 영국영화협회(The British Film Institute), 그리고 영국 정부가 그 예다. 이러한 경계는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계약서의 세부 조항, 정부 정책, 시상식 부문 규정 속에 숨겨져 있다. 예컨대, 아카데미 시상식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지를 단 두 문장으로 요약해 정의한다.
1.2.1 정의
출품 자격이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란, 극장에서 개봉된 논픽션 영화로서, 문화적, 예술적, 역사적, 사회적, 과학적, 경제적 혹은 그 밖의 주제들을 창의적으로 다루는 작품으로 정의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촬영한 산물일 수도 있고, 부분적 재연, 기록 영상, 정지 이미지, 애니메이션, 스톱모션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단, 그 핵심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있어야 한다.
정의의 첫 문장은 논픽션 영화를 하나의 연출 행위이자, 실제 소재를 “창의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인정한다. 이는 다큐멘터리를 실제의 창의적 처리라고 묘사했던 1926년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의 정의 이후 한 세기 가까이 거의 발전되지 않은 것이다. 아카데미의 정의는 사실에 기반한 소재에 중점을 두는 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실제 촬영분 외에 이용할 수 있는 기법들을 상세히 나열한다. 거기에는 ‘부분적’ 재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논리적 근거는 모호하며, ‘혹은 기타 주제들’로 끝나는 개방형 주제 목록과 ‘혹은 기타 기법’로 정점에 달하는 느슨하게 묘사된 형식적 접근법처럼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갖는다. 이 짧은 규정은 다큐멘터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재연은 오직 ‘부분적’이어야만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단일하고 정제된 경계선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칙은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형성해온 유명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까? 이 규칙이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의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1922)나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의 기념비적 작업인 〈컬로든 전투 Culloden〉(1964), 〈코뮌 La Commune〉(2000),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1974) 와 같은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알제리 감독 나리만 마리(Narimane Mari)의 〈피의 콩 Bloody Beans〉(2013)와 〈미치광이들의 요새 Le Fort des Fous〉(2017) 의 경우는? 다큐멘터리에서 재연이 허용되는 비율은 얼마까지인가? 그리고 언제 그것이 허구로 간주될 만큼의 비율을 넘어서게 되는가?
아카데미 시상식의 다큐멘터리 부문은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가장 명망 있는 부문 중 하나로 꼽히지만, 동시에 이 제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가치 체계를 형성한다. 다큐멘터리는 오랫동안 덜 화려하고, 덜 상업적으로 성공적이며, 덜 주목받고, 비평적으로도 낮게 평가받는 영화 형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는 별개의 덜 두드러진 가치 및 자격 체계 내에 배치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아카데미 시상식의 기술 부문에서 후보로 오르는 경우는 매우 드물며,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상식 역사 속에서 다큐멘터리가 ‘작품상(Best Picture)’ 후보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유일한 예외는 1929년,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논픽션 영화 한 편이 ‘최고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상(Best Unique and Artistic Picture)’에 후보로 올랐을 때뿐이다. 해당 부문은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폐지되고 없다. 그 영화는 바로 어니스트 B. 쇼드색(Ernest B. Schoedsack)과 메리언 C. 쿠퍼(Merian C. Cooper)가 연출한 〈창 Chang〉(1927)으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바로 다음 해에 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이후 20세기 중반에 다큐멘터리가 영화보다 열등한 어떤 것으로 평가절하되던 시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토착 태국인 가족으로 구성된 출연진을 ‘영화를 본 적 없는 야생의 원주민들’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 공동체의 긍정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로도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분리는 오스카뿐 아니라 여러 국제·국내 영화 시상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물론 때때로 이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시드니 마이어스(Sidney Meyers)의 〈콰이어트 원 The Quiet One〉(1948)은 최우수 다큐멘터리상뿐 아니라 각본상(Best Screenplay)에도 후보로 올랐으며, 최근에는 요나스 포어 라스무센(Jonas Poher Rasmussen)의 〈나의 집은 어디인가 Flee〉(2022)가 장편 다큐멘터리상, 장편 애니메이션, 국제영화상 세 부문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성공의 핵심은 실제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사용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며, 이는 2008년 작품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2008)이 다큐멘터리 부문 외에서도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경우와 유사하다.
다른 맥락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정의가 법적 기준으로 명시되어, 특정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영국 정부는 법인세 규정(TPC10100) 내에서 다큐멘터리를 정의하는 조항을 두고 있는데, 이 정의는 대부분의 논픽션 영화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드라마’를 설명하는 조항과 거의 동일할 만큼 혼란스럽고 모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드라마’란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 전체 또는 주된 부분이 사건(event)의 묘사로 구성되어 있을 것.
● 그 사건들은 하나 이상의 인물의 퍼포먼스(performance)를 통해 전부 또는 주로 재현될 것.
● 그 퍼포먼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대사, 연기, 노래, 춤 등을 통해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행위를 포함할 것.
드라마는 허구적 사건에 기초할 수도 있고, 비허구적 사건에 기초할 수도 있다.
해당 문서는 이어서, 무엇이 다큐멘터리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법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라는 용어는 해당 법령에서 별도로 정의되어 있지 않으므로, 통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다큐멘터리는 실제 사건들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기록하려는 비허구적 프로그램이다. 어떤 프로그램이 ‘다큐-드라마(docu-drama)’일 경우, 그것은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드라마일 수도 있다. 이는 해당 프로그램이 드라마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극적 장면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이 객관적이거나 사실적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프로그램이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은, 그것이 비-드라마적(non-drama) 요소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우 낮다.
범주적 구조를 형성하려는 법률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는 제작 전략 차원에서 인터-시네마에 위치한 실천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 사이를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스펙트럼을 사유하게 하는 다수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예컨대 비-드라마(non-drama)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라는 용어의 ‘통상적 의미(common meaning)’란 무엇인가? 퍼포먼스(performance)와 실제성(actuality)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놓이는가? 정부 차원의 다큐멘터리 정의를 논할 때, 표현의 자유와 진실을 말할 자유가 국가별 법적 관할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앞서 언급한 바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증거로서의 진실(evidential truth)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법적 틀은, 기록하고, 측정하고, 지도화하며, 알고, 통제하려는 인식론적 지배의 추구라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기록하려는 식민지적 명령, 프로파일링이라는 형사 사법 체계, 분류를 요구하는 과학적 명령과 맞닿아 있다.
공영 방송 텔레비전의 영역에서 다큐멘터리는 흔히 ‘팩추얼 텔레비전(factual television)’ 또는 ‘비각본(unscripted)’라는 동의어로 불리며, 정보 전달의 ‘정확성(accuracy)’을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한다. 영국의 공영 방송사 BBC의 경우,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제작 기법(production techniques)’에 관한 창작적 제약으로까지 확장된다. BBC 가이드라인 3.3.22항은 논픽션 콘텐츠를 규정하기 위한 여러 기준을 제시하는데, 우선 영화적 문서를 제작하는 데 있어 기술(craft)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즉, “명확성과 흐름을 개선하거나 콘텐츠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등, 내용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강하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서 특히 논쟁적인 방식은 정체성이 덜 명확하거나, 극화(dramatisation), 재연(re-enactment), 재구성(reconstruction), 혹은 수행적(performance-based) 기법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제작 방식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사전 고지가 요구되는데, 이는 관객에게 실제성(actuality)과 극적 해석(dramatic interpretation) 사이에 선이 존재함을 분명히 인지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적 정확성에 관한 규칙이 다큐멘터리 제작의 형식적 접근을 규정하도록 만드는 구조는, 영국 공영방송 BBC의 편집 가이드라인 속에 깊이 내장되어 있다. 가이드라인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서사의 현실이나 사건에 대해 관객을 실질적으로 오도할 수 있는 제작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뉴스, 팩추얼, 그리고 일부 팩추얼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경우, 관객에게 명확히 고지되거나 재구성(reconstruction)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즉, 이야기나 서사의 전개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행동이나 사건을 연출하거나 재연해서는 안 된다.’ 재구성이라는 창작 기법에 대해서는, 관찰된 현실의 세계와 재연된 세계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요구가 뒤따른다. ‘재구성은 말이나 시각적 표식, 혹은 슬로 모션이나 색 보정과 같은 시각·청각적 단서를 통해 식별 가능해야 한다. 관객에게 재구성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따라서 재구성이 포함되는 경우, 그것은 역사적 지시대상(referent)과의 근접성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범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다면 마술적 리얼리즘 작업은 이러한 가이드라인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어질 수 있을까? 혹은 트라우마를 퍼포먼스나 집단적, 신체적 기억을 통해 다루기 위해 재구성 그 자체를 창작 행위로 기록하는 최근의 작품들, 예컨대 〈우퇴위아 재구성하기 Reconstructing Utoya〉(2018)나 〈뗏목 The Raft〉(2018)과 같은 작업들은 이 기준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까?
위조, ‘관객을 오도하는 행위’, 정확성에 관한 법적 함의는 다큐멘터리 정책의 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진실과 허구 사이의 결정적 경계선은 양쪽 모두에서 창작 과정을 옥죄는 규칙들을 만들어낸다. 논픽션 영화가 재구성과 같은 허구적 장치를 사용할 때 이를 명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라마 또한 사실에 근거한 경우에는 민감성, 명확화, 그리고 원천 증거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준법 감시에 대한 BBC의 편집 정책은 드라마에서도 공정성과 정확성을 요구한다. ‘드라마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할 경우, 일부 극적 요소가 허구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가능한 한 충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에 기초해야 하며, 연대기 등 이미 알려진 사실을 과도하게 왜곡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드라마와 논픽션 사이의 법적 경계선은 영화 제작자들의 관행 위반과 모호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점점 더 도전받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Baby Reindeer〉(2024)를 둘러싼 최근의 소송은, 작품을 극화와 드라마2 사이 어디에 두는지에 대한 창작자의 모호한 태도와 얽혀 있다.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피오나 하비(Fiona Harvey)는 현재 제작진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상태다. 이 법적 혼선의 한 원인은 작품 도입부에 “이것은 실화다(This is a true story)”라는 문구를 사용한 데 있다. 이는 통상적인 법적 거리두기 표현인 “실화에 기반함(Based on a true story)”과는 다르다. 이후 창작자이자 주연인 리처드 개드(Richard Gadd)는 법원 제출 문서에서 이 문구를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시리즈는 극적 작품(dramatic work)이다. 다큐멘터리도, 리얼리즘을 시도한 것도 아니다. 내 삶과 실제 사건들에 기반하고 감정적으로는 진실이지만, 이는 사건과 감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허구화되었으며 실제 사실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없다.” 이 판결의 결과는, 진실과 허구,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규정하는 언어 사이에 더 큰 법적·창작적 거리를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영화가 현실을 제시하고 있는지, 아니면 느슨한 형태의 황홀경 혹은 개인적인 진실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 제작된다면 무엇을 잃게 될까?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의 날카로운 에세이 「현실-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2017)는, 탈진실의 흐릿한 공간을 조장하는 것이 미디어 형식 전반에 대한 신뢰, 그리고 진실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더욱 붕괴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문제 삼는다. 발솜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영화는 공격받는 현실(embattled real)과 어떤 방식으로 회복적(reparative)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그리고 또 말한다. ‘사실과 허구의 구별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현실이 붕괴했다고 공황적으로 선언하는 태도는, 때로는 현실의 붕괴를 더욱 가속할 뿐 거의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그는 영화 형식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없다면, 유동적인 영화는 논픽션 이미지에 대한 집단적 신뢰를 더욱 훼손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과의 재접속을 향한 새로운 진보적 관찰 다큐멘터리 흐름을 언급한다. 특히 하버드 감각민족지학 랩(Harvard Sensory Ethnography Lab)과 연관된 영화 제작자들 예컨대 J. P. 스니아데키(J. P. Sniadecki)의 〈철의 나라 The Iron Ministry〉(2014), 베레나 파라벨(Verena Paravel)과 루시앙 캐스팅-테일러(Lucien Casta-ing Taylor)의 〈리바이어던 Leviathan〉(2012), 스테파니 스프레이(Stephanie Spray)와 파초 벨레스(Pacho Velez)의 〈마나카마나 Manakamana〉(2013)이 그 사례로 제시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규정하려는 영화제와 시상 제도, 법적·편집적 정책의 구조들은, 이 비교적 젊은 예술 형식이 변화하는 현실과 이미지·사운드 포착 기술의 변화에 대응하려 애쓰는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현실을 심문하고, 층위화하며, 구조화하는 방식을 통해 그러한 변화하는 관계들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들은 논픽션 영화에 대한 확장된 비전을 제시하며, 진실과 맺는 취약한 관계를 유희하고 이를 사유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발솜이 강조하는 것처럼 이들이 현실-기반 예술의 힘을 더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1.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Rules and Eligibility, https://www.oscars.org/oscars/rules-eligibility
2. Erika Balsom, “The Reality-Based Community”, e-flux journal, no. 83 (June 2017), online
https://www.e-flux.com/journal/83/142332/the-reality-based-community
3. BBC Editorial Guidelines, https://www.bbc.com/editorialguidelines/guidelines
4. Stella Bruzzi, New Documentary: A Critical Introduction (London: Routledge, 2000).
5. John Corner, The Art of Record: A Critical Introduction to Documentary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6).
6. John Grierson, “Contact”, Cinema Quarterly, vol. 2, no. 1 (Autumn 2007), 47.
7. Alexandra Juhasz and Alisa Lebow, “Beyond Story; An Online, Community-Based Manifesto”, World Records Journal, vol. 2, (November 2018). https://worldrecordsjournal.org/beyond-story-an-online-community-based-manifesto/
8. Maria Lind and Hito Steyerl, The Green Room: Reconsidering the Documentary and
Contemporary Art #1 (New York: Stenberg Press, 2008).
9. Bill Nichols, Introduction to Documentary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2010).
10. Carl Plantiga, “What a Documentary Is, After All”,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vol. 63, no. 2, 105-117.
원본 도서 Hybrid Documentary and Moving Image
by Luke W. Moody
Routledge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