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tographies of the Absolute 절대자의 지도제작들

Introduction: The Limits of the Known Universe, or Cognitive Mapping Revisited 인트로덕션: 알려진 우주의 한계, 혹은 인지적 맵핑의 재고

번역 임유빈

별의 움직임은 점점 더 명확해졌지만,
대중 민중에게 있어 그들 지배자의 움직임은 여전히 계산 불가하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갈릴레이의 생애 The Life of Galileo

위로부터의 보기 (Views from Above)
찰스와 레이 임스(Charles and Ray Eames)의 단편 〈10의 제곱수 Powers of Ten〉(1977)는 시카고 레이크프론트 공원의 피크닉 담요 위에 누워 있는 젊은 연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오버헤드 쇼트로 포착되며, 내레이터는 카메라가 이들로부터 1미터 상공에 위치해 있고 이후 10초마다 거리 단위가 10의 제곱으로 증가할 것임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프레임은 대기권을 통과해 우주 공간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면서 지구 표면에서 1024미터 상공에 이르러 태양계와 은하계를 벗어난다. 깊고 고요한 우주에서부터 ‘카메라’—공들여 합성된 시뮬레이션1—는 방향을 바꿔 빠른 속도로 담요 위의 커플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한다. 다시 이들에게 도달한 카메라는 남자의 손에 초점을 맞춘 뒤 10초마다 90퍼센트씩 줌-인하며 마침내 10⁻16미터의 스케일에서 탄소 원자의 쿼크를 관찰하기에 이른다. 9분도 채 되지 않는 이 단편은 당시 알려져 있던 우주의 상한과 하한을 모두 보여준다.

미시와 거시를 가로지르는, 동류의 신의 시점(god’s-eye-view) 쇼트는 앨런 J. 파큘라(Alan J. Pakula)의 스릴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All the President’s Men〉(1976) 중반부에도 등장한다. 저널리스트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의 워터게이트 빌딩에서 발생한 침입 절도 사건에대한 취재는 그들을 미국 의회도서관의 중앙 열람실 책상에 앉아 수많은 대출 신청 카드 더미를 검토하도록 이끈다. 이 기념비적인 쇼트는 주인공들의 손을 하이앵글로 클로즈업하기 시작하고, 약간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 천장까지 상승한다. 아래로는 동심원으로 배열된 책상들과 거의 식별되지 않을 만큼 작게 보이는 존재들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듯이 연필, 도서관 카드, 공공 기록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자료를 무기삼아 국가의 가장 강력한 인물들을 밝히려는 기자들의 과업이 지닌 막중함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2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 장면에 보다 사변적인 독해를 더해 이를 사회적 형이상학이자 정치적 미학을 동시에 구현하는 장면으로 읽는다.

“상승하는 카메라 쇼트는 두 조사자의 열병에 가까운 탐색을 축소시키면서, 원형 발코니로 구성된 열람실의 얼어붙은 우주론적 질서를 드러낸다. 이는 지식 그 자체와 천문학적 총체성 자체의 건축적 질서 사이의 순간적인 일치를 확인시켜 주며, 역사를 조직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재현불가한 것, 즉 섭리적인 것을 잠시나마 엿보도록 한다.”3

제임슨은 이 쇼트를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단편 에세이 영화 〈세상의 모든 기억 Toute la Mémoire du Monde〉(1956)의 위로부터의 시점 쇼트들과 비교한다. 인간 기억과 지식에 대한 일반적인 성찰과 겹쳐지는프랑스 국립도서관을 탐구하는 이 영화는 파리 도서관의 열람실의 오버헤드 쇼트로 끝난다. 이 장면에서 내레이터는 각자 자신만의 작은 지식의 조각에 집중하는 독자들의 활동에 대해, ‘각자가 우주적 기억의 조각을 다루면서, 하나의 비밀 조각들을 끝과 끝으로 이어 붙이게 될 것이며, 그 비밀은 아마도 "행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제임슨은 이 비밀을 가리키는 말로서 ‘행복’은 최선의 표현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에게 ‘궁극적인 지시체, 우리 시대 존재의 진정한 토대’는 자본(Capital)이기 때문이다.4

이러한 오버뷰들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수반되는 탐구와 시각의 과정, 그리고 그처럼 모든 것을-포괄하는-앎의-의지(all-encompassing will-to-know) 이면에 숨겨진 야심의 크기를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극화한다. 동시에 이는 자연과 사회, 우주와 자본의 인식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에 내재된 긴장감을 드러낸다. 이임스 부부가 이 영화를 만든 지 35년이 지난 지금, 더욱 정교해진 기술 덕분에 지도 제작자는 세계를, 천문학자는 우주를, 분자 생물학자는 유전체를, 원자 물리학자는 우주의 구성 요소를 더욱 정밀하게 지도화할수 있게 되었다 (가장 작은 측정 단위인 플랑크 길이는 10⁻35미터이고, 알려진 우주의 크기는 어느 방향으로든 460억 광년, 즉 약 1027미터에 이른다). 파큘라와 레네의 작업 이후, 특히 최근 ‘빅데이터’ 시대로의 전환과 함께 이러한 국가적 소장 컬렉션의 규모 역시 증가해왔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하루에 약 1만 점의 자료를 소장 목록에 추가한다).5 하지만 브레히트의 경구를 되풀이하자면, 지식을 하나의 전체적인 조망, 수직적인 확대와 축소, 현대의 ‘신의 지식(scientia dei)’, 즉 신의 시점 뷰로 묘사하는 이러한 영화적 시퀀스들은 정치경제와 사회 갈등의 이해 가능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제임슨의 말이 맞다면, 즉 ‘자본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이제 우리의 진정한 존재론’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우주의 절대적인 맵핑(mapping)으로부터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세계 체계로서의 자본에 대한 지도제작(cartography)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6 이임스 부부가 정교하게 연출한, 세계-지식을 매끄러운 연속체로 보는 이미지가 복잡하고 논쟁적인 과학적 재현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면, GPS와 구글 지도와 같은 관련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사회 세계에 대한 이해는 군사적이거나 상업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유용할지 몰라도, 놀랍도록 신뢰할 수 없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지도는 오히려 지도 제작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의 모순을 덮어버리는 스케일과 정확성에 대한 페티시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보기들은 수직적 줌이 ‘자유 낙하(free fall)’의 상태, 즉 우리의 미학적 장치도, 정치적 전략도 ‘하나의 통합된 지평선’에 기대어 스스로를 위안할 수 없는 조건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혹은 형벌과도 같이 왜곡하도록 만든다. 그녀는 이렇게 관찰한다.

“위로부터의 보기는 군사, 엔터테인먼트, 정보 산업의 렌즈와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는 위로부터 격화되는 계급전쟁의 맥락에서 계급 관계의 일반적인 수직화에 대한 완벽한 환유다. 이러한 시선은 확장된 3-D 주권이라는 배경 위에 안정, 안전, 그리고 극단적인 지배력에 대한 환상을 투사하는 대리적 관점이다. 그러나 만약 위로부터의 새로운 보기들이 사회를 공중 감시와 생명정치적 통제를 받는, 자유 낙하하는 도시의 심연이자 분열된 점령지로 재구성한다면, 이는 선형 원근법이 그러했듯이, 자기 파멸의 씨앗을 그 내부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7

이러한 씨앗을 주워 모으기에 앞서, 우리는 또한 이러한 수직성의 정치가 글로벌리티의 정치, 즉, 〈10의 제곱수〉가 다이어그램화한 스케일의 팽창이 예견하는 잠재적인 방향 감각 상실을 붙잡아 두려는 행성적 패러다임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1968년이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the whole world is watching)’라는 슬로건의 해였다면, 캘리포니아 기업가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와 그의 『지구 백과 Whole Earth Catalogue』(1966–1974)는 이를 영적이자 사이버네틱한 동어반복, 즉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바로 세계를(the whole world is watching… the world)’이라는 형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순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같은 인물들이 1968년을 물류 국가8의 ‘동질적이면서도 부서진’ 공간으로 공간적 차이가 돌파해 들어온 해로 규정했다면, 『지구 백과』가 ‘푸른 행성’에서 찾아낸 생태주의, 문화 해방주의, 테크노필리아, 뉴에이지 사상의 겉보기에만 절충주의적인 종합은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가 ‘마지막 보편주의적 아이콘’이라고 명명한 것을 발견하도록 했다. 이는 계급, 인종, 젠더, 적대를 초월한 차별없는 통합의 상징인 동시에 ‘무한한 봉쇄(boundless containment)’9의 표상과 겹쳐지며, (재현 불가능한) 부정성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통합에 대한 무미건조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약속과 자본의 우주적 자연화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를 계속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브랜드의 선구적인 지구풍경이 예시한 시각적 레짐은 군용 및 상업용 위성 복합체를 통해 행성적 보기를 재생산하며, 상대성의 논리를 구현하면서도 전체성(wholeness)의 효과를 끊임없이 산출하는 ‘이론 기계(theory machines)’를 구성한다. 오늘날 ‘홀 어스’ 이미지는 ‘위성 탑재 센서들이 수집한 방대한 양의 원격 감지 데이터가 합성물’이지, 더 이상 ‘사진’이 아니다. 로라 커건(Laura Kurgan)이 우리 시대의 지도제작적 순간을 기술적으로 정밀하고도 통찰력 있게 분석하며 지적했듯, 오늘날 ‘맵핑’의 편재성은 ‘방향 설정이라는 기치 아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중심을 벗어나려는 이 레짐이 지식의 구멍을 메우고, (니체의 말처럼) ‘중심에서 x를 향해 굴러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지구라는 아이콘—궁극적인 위치의 시뮬라크럼—으로 완화하려 한다는 점은 더욱 아이러니하다.10 브랜드의 카탈로그는 ‘왜 우리는 아직 전체 지구의 사진을 보지 못했는가?’라고 적힌 배지를 배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전체 지구의 이미지들, 우리의 지배를 은폐하는 수많은 위로부터의 보기를 보게 되는 일을 멈추게(stop) 될까?

무엇이 인지적 맵핑인가? (What is Cognitive mapping?)
이 책의 제목인 『절대자의 지도제작들 Cartographies of the Absolute』은 제임슨이 『지정학적 미학 The Geopolitical Aesthetic』 서문에서 ‘인지적 맵핑의 미학(the aesthetic of cognitive mapping)’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칭할 때 단수형으로 사용한 구절로부터 왔다. 1980년대 중반, 레이건주의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이던 시기, 그리고 북반구–그리고 그 외 지역에서도–의 좌파의 기세가 저점이던 시기에 제임슨은 한 전투적이었던 학회 발표에서 이같은 미학의 출현을 촉구했다. 이는 문화 비평의 나침반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에 맞서려는 보다 넓은 노력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이 미학의 존재를 선언하거나 특정한 작품군 속에서 그것을 발견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그것이 정교화되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학은 후기 자본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우리 시대에 사회 공간과 계급 관계를 묘사하려는 매우 야심찬—그리고 제임슨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과제에 적합한 문화적이고 재현적 실천의 긴급한 정교화를 요구한다. 이 요청의 배경에는, 도시학자 케빈 린치(Kevin Lynch)의 ‘인지적 맵핑’이라는 공식화를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 정의–이데올로기란 주체가 실재(the Real)와의 관계를 상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와 접합시킨 하나의 주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세계 시스템의 톱니바퀴와 윤곽을 인지적으로 맵핑하지 못하는 것은 도시 거주자가 도시를 정신적으로 지도화하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 행동을 쇠약하게 한다는 것이다.11 자본의 추상성을 일상적 지각의 감각-데이터와 연결할 수 있는 방향 설정의 실천의 부재는, 모든 사회주의적 프로젝트에 대한 장애물로 지적된다.12

이러한 미학의 기치 아래 등장하는 작업들은 개인과 집단이 자본주의 세계 체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도록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전체로서의 사회 구조라는 거대하고 본질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총체성에 대해 상황적(situational) 재현을 개별 주체로 하여금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3 이러한 예술 작품과 서사는 단순히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면서도, 필연적으로 교훈적이고 교육적인 성격 또한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순간에 정치적 가르침과 교육, 심지어는 프로파간다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재구성한다.14 쟁점은 우리의 현재가 지니는 형상가능성(figurability) 혹은 재현가능성과 그것이 정치적 행동에 미치는 형성적 효과이다. 즉, 자본주의 맵핑은 동시대 지배의 정치적 해부학으로부터 ‘지렛대’, 신경중추, 혹은 약한 고리를 식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지적 맵핑이라는 아이디어는 역사적 변화와 문화와 정치경제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증에 내재되어 있다. 각 시대는 비록 부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일지라도 그 세계를 재현하고 ‘총체화(totalise)’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 형식과 표현 양식을 발전시킨다. 어니스트 만델(Ernest Mandel)과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선구적 연구에 이어, 제임슨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와 문화적 재현 양식 사이의 상관관계 패턴에서 세 가지 핵심 단계를 제시한다.이 역사적 ‘토대’는 고전적 혹은 시장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제국주의), 그리고 동시대의, 즉 포스트모던이다. ‘고전적’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재현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총체성’은 도시와 국가라는 정치-경제적 공간, 즉 위대한 리얼리즘적이고 자연주의적 내러티브의 공간 속에서 비교적 설득력 있게 그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과 집합, 지역과 세계 사이의 지향적 관계로 이해되는 재현은 자본의 식민주의적 투사와 함께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후기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한 사무원의 삶을 결정하는 힘은 그의 살아온 경험이나 지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제임슨의 시대 구분이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의 ‘핵심부(core)’로부터의 보기에 기대고 있다는 것에 되돌아갈 것이다). 제임슨의 표현대로 그의 ‘진실’은 대영제국의 전체 식민 체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너무나 멀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무엇보다도 그 자신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그는 징고주의적(jingoistic) 클리셰의 스크린을 넘어서는 방식으로는 그것을 결코 ‘종합’할 수 없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억압은 서서히 폐제로 넘어가며, 제국주의적 세계시스템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공간적 분절의 즉각적인 결과는 시스템이 전체로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따라서 고전적인 국가주의적 혹은 시장 자본주의의 단계와 달리, 퍼즐의 조각들은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은 결코 완전히 재구성될 수 없다. 개인적 경험의 확장(예컨대, 다른 사회 계급에 대한 지식), 자기 성찰의 강도(어떠한 형태의 사회적 죄책감이든), 혹은 제1세계 데이터의 내부 증거에 근거한 과학적 연역 그 무엇도 식민지 생활의 근본적인 타자성, 식민지의 고통과 착취를 포함시키기에 결코 충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것들은 대도시의 일상적 삶과 부재하는 식민지의 공간 사이, 다시 말해 이것과 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연관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이를 수 없다.”15

이로부터 ‘내재성(immanence)’의 제국주의적 종말이 도출된다. 제국의 대도시 거주자들은 여전히 다양한 조사와 형식적인 전략의 힘으로 사회 세계의 진실을 ‘안으로부터’ 밝혀내고 경험적이고 인지적인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유럽적 허무주의’라는 체화된 경험, 곧 의미의 공허와 상실은 부인된 채로 식민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식민지는 다시금 ‘다른 차원’—조용히—예술적 모더니즘에 (형식적) ‘문제’의 (내용)을 제시한다. 이는 ‘제국주의의 구조 또한 [모더니즘의] 내적 형식과 구조에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16 이러한 유물론적 해석학은 제임슨이 E. M. 포스터(E. M. Forster)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서사에서 무한성의 경험이 솟구쳐 오르는 양상을, 총체성의 새로운 구성—그리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새로운 유형의 부재—와의 형식적 투쟁을 가리키는 지표로 읽어낼 수 있도록 했다. 이들에게 있어 ‘일상적 지각은 제국주의의 비지각적인 공간적 총체성에 대한 어슴프레한 감각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남으로써 교란된다.’17

제임슨이 인지적 맵핑의 제국주의적 계보를 다루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재현, 가시성, 그리고 미학이 어떻게 서로 절합되는지에 대해 아마도 가장 분명한 감각을 얻게 된다.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모더니즘의 곤경은 ‘재현적 효과’가 ‘객관적 효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간의 분절과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은 제국주의의 정치경제를 구성하는 요소다. 문학과 예술을 초과하는 재현 문제의 ‘가장 명백한 결과들’은 미학의 영역에서 포착되는데, 그것은 ‘고급’ 예술의 형식적 혁신에서뿐만 아니라, 모험 소설과 같은 대중 예술에서 인종적 상상력이 수행하는 타자성의 포섭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제국주의적 세계 시스템의 맵핑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의 가장 필수적인 타자적 구성 요소, 즉, 대응항으로서의 식민화된 타자가 비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18 다시 말해, 일종의 정치적이고 경제적 비가시성이 하나의 재현 질서의 근간을 이루며, 이 질서는 미학의 차원에 기록되고 변형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후기 자본주의 조건 아래에서 인지적 맵핑의 미학을 제안하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정치적 가시성을 강제로 출현시키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배적인 재현 레짐이 지닌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효과에 대항하고자 하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문화 생산자들은 대부분 새롭게 상호연결된 전지구적 현실의 지도를 말 그대로 만들어내려 하지도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평가의 임무는 자본주의 권력이 행성적 연결망으로 공고화되는 과정과, 동시에 그것을 상상하려는 다양한 투쟁의 징후를 함께 포착하는 데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징후적 읽기, 그리고 그와 함께 수행되는 변증법적 비평은 자본주의의 목표이자 전제인 ‘세계 시장’이 현실화될수록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다. 제임슨은 제국의 시대가 공고화됨과 함께 여러 작가들이 그가 ‘단자적 상대주의(monadic relativism)’라고 부르는 형식을 독자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방식을 지적한다. 지드(Gide), 콘래드(Conrad), 페소아(Pessoa), 헨리 제임스(Henry James), 프루스트(Proust)의 작업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의식이 하나의 닫힌 세계가 되며, 그 결과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재현은 이제 봉인된 주관적 세계들과 그 특유의 상호작용이 공존이라는 (불가능한) 형식을 취해야 하는데, 이는 밤에 스쳐 지나가는 현실의 배들처럼 결코 교차할 수 없는 선과 면의 원심 운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19 우리의 세 번째이자 ‘후기’ 국면은 재현과 방향 설정의 차원을 위한 더욱 큰 도전들, 혹은 본격적인 봉쇄를 제시한다.

앞서 언급했듯, 제임슨의 인지적 맵핑 개념은 미국의 도시학자 케빈 린치(Kevin Lynch)가 1960년에 출간한 『도시의 이미지 The Image of the City』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얇은 책에서 린치는 도시 거주자들이 자신들이 구축한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항해하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도시학자로서 그의 관심은 어떤 종류의 도시, 건물, 랜드마크, 교통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풍부한 도시 경험을 제공하는가에 있었다. 린치는 잘 계획된 도시 (혹은 최적의 방식으로 발전한 도시)는 거주자들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방문객에게도 ‘가독적(legible)’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그러한 도시는 특정한 심상성(imageability)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린치는 주로 보스턴, 저지시티, 로스앤젤레스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거주자들을 인터뷰하고 설문조사하면서, 그들이 도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탐색하는지에 주목했다. 즉, 도시를 이동하면서 머릿속으로 어떻게 그 도시를 상상하는지, 혹은 기억으로부터 자신의 도시 환경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지도 제작과 도시계획의 언어는 재현 혹은 ‘형상(figuration)’의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문제들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고, 그것을 일상적 삶에 뿌리내리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는 도시 공간에 투사된 텍스트의 메타포에 대한 심층적인 이데올로기적 특징에도 민감해져야 한다. 이는 르페브르가 거듭 지적했듯, 공간의 근대적 추상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도시의 ‘이미지’를 관조하는 것을 넘어, 맵핑은 무엇보다도 개인이 도시 공간을 성공적으로 혹은 비성공적으로 헤쳐 나가는 방식과 관련된 실천이다.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쓴다.

“린치는 우리에게 소외된 도시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치나, 자신들이 처해 있는 도시적 총체성을 (마음속에서) 맵핑할 수 없는 공간임을 가르쳤다. […] 따라서 전통적인 도시에서의 탈소외는 장소 감각을 실천적으로 재점유하고, 기억 속에 보존될 수 있으며, 개별 주체가 이동적이고 대안적인 궤적을 따라 끊임없이 맵핑하고 다시 맵핑할 수 있는 관계로 조직된 앙상블을 구성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포함한다.”20

이로부터 특정한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자기-의식’을 드러내고 동시에 촉발하는 인지적 맵핑의 미학에 대한 요구가 도출된다. 즉, ‘여기서 제안되는 인지적 맵핑 개념은 린치의 공간 분석을 사회 구조의 영역으로 외삽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다시 말해 우리의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는 전지구적 (혹은 다국적이라고 말해야 할) 규모에서의 계급 관계의 총체성으로의 외삽을 의미한다.’21 제임슨은 훗날, 1920년대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조르주 루카치(Georg Lukács)가 제기했던 계급의식이라는 정치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를, 전형적인 자신의 표현으로서, ‘포스트모던’ 미국의 도시 공간에서 나타나는 무분별한 팽창과 토지 수탈의 맥락으로 ‘약호전환(transcoding)’했음을 고백한다.22

사회적 형식과 미학적 형식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는 제임슨의 구상은 방향 감각 상실에 대한 그의 이해를 특히 강력한 것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선례들 역시 지니고 있다. 특히 이는 정치적 침체기 속에서 집필된 또 하나의 기획적 텍스트, 1959년에 출간된 C.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 The Sociological Imagination』과 공명한다. 이 저작은 기술관료적 일차원성을 탈구시킬 수 있는 탐구와 연구의 정치학에 가까운 무언가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응축하고 있다. 맵핑이나 상상력과 같은 넓은 의미로 미학적이며 투사적인 용어들이 반-정치적인 시대에 정치적으로 사고하려는 연구들을 추동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들이 권력의 지렛대, 구조, 장치들에 대한 이해와 정치적 개입을 연결하려는 현재의 노력에 여전히 말을 건넨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밀스의 신랄한 일격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내놓았던 많은 예언적 선언들 (예컨대 ‘이데올로기의 종언’)보다 훨씬 덜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우리 시대는 불안과 무관심의 시대다. 아직 이성이 작동하고 감수성이 펼쳐질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정식화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가치와 위협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문제들 대신, 종종 막연한 불안의 고통이 존재하며, 명시적인 쟁점들 대신에는 모든 것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막연한 느낌만이 존재한다.’23 『사회학적 상상력』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지적 장인정신의 에토스와 ‘역사의 구조적 메커니즘에 대한 집합적 자기-통제’라는 정치적 이상을 결합시키면서, 사회과학을 전기, 역사, 그리고 이 둘이 사회 구조 속에서 교차하는 지점을 다루는 학문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이미지다.24 이는 언뜻 보기에 무난해 보일 수도 있지만, 구조적 ‘거대 이론’과 연구국의 ‘추상화된 경험주의’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시사하듯, 밀스는 사회 사유의 이 고전적 요청이 위협받고 있으며, 그 정치적 귀결이 극히 심각하다고 보았다.

사회 지식에 대한 공적 요구와 학문적 관행 사이의 괴리는 밀스로 하여금 ‘부유한 사회의 사회과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만든 이유였으며, 그는 사회 문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가 ‘우리 시대에 특권을 누리는 인간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인간적 결함’이라고 지적했다.25 대신 상상력 있는 사회사상가의 소명은 개인의 불안과 집단적 변형 사이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는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적 저항으로부터 행정주의적 실용으로의 이행은 그러한 과업을 불가능하게 만들 위험이었으며, 이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밀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기본적인 문제’ …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대개 전기의 ‘심층’에서 발생하는 근심과, 역사적 사회의 바로 그 구조로부터 발생하는 무관심 모두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문제를 선택하고 진술함으로써 우리는 먼저 무관심을 쟁점으로, 근심을 문제로 번역해야 하며, 다음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문제와 쟁점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 … 문제에 대한 어떤 적절한 ‘해답’이든, 그것은 구조가 유지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다시 말해 구조를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와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평가를 포함할 것이다.”26

밀스가 분투했던 냉전기의 순응주의가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요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밀스가 자신의 시대를 하나의 문지방으로 간주했으며, 실제로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를 제4의 시대(The Fourth Epoch)라 명명하며, ‘그 안에 포함된 다양한 사회 세계들이 처음으로 심각하고, 급속하며, 그리고 명백하게 상호작용하는’ 시기라고 규정했다.27 이러한 점에서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신랄한 논쟁 속에서 굴절된 형식으로 지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밀스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공중에 떠 있다”. 만약 “지구”에 너무 가까이 머문다면, 결코 새로운 영역 위로 날아오를 수 없다. 이론은 한 켤레의 무거운 부츠가 아니라 비행기다. 그것은 정찰과 첩보의 영역에 속한다.’28 정찰, 첩보, 지도제작, ‘상황적 재현’—밀스와 제임슨은 이론의 미학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미학은 준군사적이면서도 도시주의적인 참조들을 통해, 총체화하는 시선—그 부재 혹은 현재적 불가능성—과 전략적 필연성 사이의 얽힘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렛대’를 찾아내고 결국 그것을 장악함으로써 무력함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들 (Other worlds)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행성과 종이 ‘세계됨(worlding)’ 을 겪는다는 것은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는 관념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 공간의 항법을 관통하고 그것을 상당 부분 구성하는 커뮤니케이션을 매개하는 테크놀로지들 속으로, 이러한 관념들이 점점 더 깊이 통합되어 가면서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신의 지식(scientia dei)을 모방하는 장치들을 아무리 많이 사용하더라도, 글로벌한 사회 공간의 시점은 주관적이고 부분적이다. 그것은 과거 경험의 변덕스러움,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읽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에 기반한다—말하자면, 우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무의식에 있다. ‘인지적 지도(cognitive maps)’는 계급,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축을 따라 서로 달라지고 재조합된다. 그것들은 실천의 부침, 도시의 서로 다른 사용 방식, 이데올로기, 그리고 ‘세계관(world-views)’이라는 다소 무거운 이름을 지닌 현실에 대한 종합적 태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어떤 지도들은 분리되고 배제된 이들을 비가시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종종 갈등을 간신히 억누르는 방식으로, 공간의 ‘단일성(oneness)’은 차이와 단절로 포화되어 있다.

우리가 총체성을 향한 지향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세계됨의 관점을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상상력의 후기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는 비판자들의 문제 제기를 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상력은 차이를 시간적 선 위에 배치하고, 그 선을 착취와 예속의 영토 위로 투사함으로써 동질화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의 논의를 대체로 넘어서는 것이지만, 제임슨이 근대성의 경험과 문학 장르의 계승을 이해하는 자신의 방식에서 보여주듯, 인지적 맵핑의 문제는 자본 축적의 중심이자 제국주의적 상상력의 이데올로기적 길잡이인 ‘서구(the West)’에서 제기되고, 또한 그로부터 제기된 문제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앞서 암시했듯이, 제국의 시대—모더니즘과 그 미학적 추상이 발생하고 서로 중첩되며 얽히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지와 지도제작의 결절점은 진정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제임슨은 서구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다시 말해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급진적 분리가 낳은 결과로, ‘우리의 사적 존재의 살아 있는 경험이 경제학과 정치 역학의 추상들과는 어떤 의미에서 공약불가능하다는 깊은 문화적 확신’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29 모더니즘의 추상—공간, 시간, 행위성에 대한 개념들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균열에 대응하거나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형식적 발명들 속에 나타나는 추상—은 그 ‘부재 원인(absent cause)’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무의식(political unconscious)’의 차원에서, ‘우리’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 원인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구성하는 착취, 수탈, 예속의 과정 속에, 다시 말해 다른 곳에 놓여 있다는 깨달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제국주의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제국주의는 그 안에 거주한다. 즉, 형식을 형성함으로써 마치 존재가 오직 그것이 야기하는 변형들을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는 이상한 끌개처럼 말이다.30 인지적 맵핑의 이러한 제국적 기원을 고려하는 것은 그것을 포스트모더니티의 현상들과 단순히 동일시하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범위를 확장시키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21세기에 걸쳐 형성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의 복합적 산물로 드러나게 한다.

미적 경험의 형식이 역사적 자본주의의 지리학과 리듬에 의해 매개되며, 근본적으로 불균등한 세계에서 경험과 추상, 일상생활과 자본의 힘 사이의 단절을 사유하지 않고서는 서사의 변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가설은 제임슨이 자신의 인지적 맵핑에 대한 에세이 이후에 집필한 한 텍스트의 배경을 이룬다. 이 텍스트는 아이자즈 아흐마드(Aijaz Ahmad)를 비롯한 탈식민주의 비평가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의 제3세계 문학 Third-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1986)이다. 우리는 이 논쟁 자체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제임슨에 대한 유보적 방어는 닐 라자루스(Neil Lazarus), 닐 라르센(Neil Larsen), 마다바 프라사드(Madhava Prasad) 등으로부터 제시된 바 있다31), 우리에게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가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정치적이고 인식론적인 차이, 그리고 각각의 사회적이고 문학적 경험의 형식 혹은 장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른바 ‘비-정전’ 텍스트들의 동등한 가치를 보편주의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텍스트들이 지니는 적대적인 단독성(antagonistic singularity)을 강조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입장은 어쩌면 불가피하게도 우리/그들, 현재/과거, 중심/주변이라는 메커니즘의 복원으로 비평가들에게 보여지기도 했다. 제임슨이 미국 제국주의가 이러한 이분법들을 산출한다고 전제했다는 점에서, 그는 그것들이 실제로 왜곡된 세계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이분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던 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임슨에게 있어 이것은 선진과 후진 사이의 역사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비안(Johannes Fabian)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가 동시적(coeval)이기 때문이었다.

인지적 맵핑의 문제는—이 책이 주로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생산된 자료들을 다루고 있기에 암시적으로만 언급해 왔던 방식들로—지정학적·식민적·인종적 역사에 의해 중층결정(over-determined) 되어 있다. 제국의 시대에 대도시 모더니즘을 특징짓는 경험과 추상의 단절은, 제3세계 문학에서 ‘사적 개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나 제3세계 공적 문화와 사회의 투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는 ‘민족적 알레고리(national allegory)’와 대조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매우 다른 비율’이 형성된다.32 이는 아흐마드가 제임슨을 비판하며 지적했던 민족주의 미학의 도구적 협소성으로의 격하라기보다는, 제3세계 문학이 필연적으로 정치화되어 있으며 자본주의 지배의 재현 불가능성을 우회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반제국주의적이고 탈식민적인 투쟁의 알레고리라는 가설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배의 특권은 경험의 빈곤과 지식의 결핍을 동반한다. 즉, ‘위에서 내려다본 시선은 인식론적으로 무력화시키며, 그 주체들을 파편화된 주체성들의 환상 속으로, 고립된 단자들의 개별적 경험의 빈곤 속으로, 집단적 과거도 미래도 없이 죽어가는 개별 신체들로 환원시키고, 어떠한 사회적 총체성을 파악할 가능성도 박탈한다.’33 이러한 구절들에서 인지적 맵핑의 주체인 ‘우리’는 불안정한 존재로 드러난다. 그것은 제국, 특히 제국주의적 (미국) 시민의 무지와,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지식인이 계급의식을 향해 분투하는 지점 사이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족될 수 없는 인식론적 명령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 A Plea for the Intellectual」에서 제시한 밀도 높은 영화적 메타포 속에 아마도 가장 잘 압축되어 있다. 사르트르에게 지식인은 ‘지배당한 자의 객관적 시점’을 취해야 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아래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본 틸트 샷에서, [엘리트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문화적 엘리트가 아니라 사회의 삶을 재생산하는 계급을 온 힘을 다해 짓누르는 거대한 조각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같은 높이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가능한) 상호 인정, 예의, 비폭력은 존재하지 않고, 감내된 폭력, 소외된 노동, 그리고 부인된 기본적 욕구의 파노라마만이 펼쳐질 뿐이다. 만약 지식인이 이 단순하고 급진적인 시점을 채택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을 정말 있는 그대로, 아래로부터 보게 될 것이다.”34

이러한 정치적 관점의 비틀림은 예술적이거나 지도제작적인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1929년에 제작된 초현실주의 세계 지도(Surrealist Map of the World)를 떠올려 보자. 이 지도는 대서양과 제국적 북부를 사실상 소멸시켜 압축해 버림으로써 (파리를 제외한) 백색의 중심부를 사라지게 하는 한편, 초현실주의의 원시주의적 충동을 읽어내는 이들도 있는 과도하게 비대해진 알래스카와 집요하게 부각된 파푸아뉴기니의 윤곽을 그려내며 유쾌하게 왜곡된 평면도를 제시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거대하게 떠오르는데, 초현실주의가 지닌 갈등하는 공산주의적 연대 때문에 그 제스처는 한층 더 정치적으로 모호해진다. 이 지도의 일차적 동력이 제국주의적 유럽과 자본주의적 미국을 ‘얕잡는’ 데에 있었을지라도, 데이비드 로에디거(David Roediger)가 하이파 잔가나(Haifa Zangana)의 작품 〈지도의 붕괴 Destruction of a Map〉(1978)와의 비교에서 제안하듯, 그 추진력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적,.기술관료적 지도 제작의 구체성에 도전하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재현으로서의 지도 제작이라는 관념이 비참한 세계를 수용하도록 부여해 온 정확성과 과학의 외피를 폭로하는 데에도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35 바로 이 세계—검은 피부와 흰 지도의 세계—는 1956년에 벨기에 초현실주의 잡지 『레 레브르 뉴 Les lèvres nues』에 실린 지도에서도 도전받았다. 그 지도에서는 프랑스 육각형 지명이 알제리 지명들에 의해 다시 점유되고, 대항-식민화되었다.36 왜곡과 치환의 대항사실적 전도를 반식민주의의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무기에 포함시킨다면, 백인 ‘제1세계’의 지배가 전복되는 내러티브로 테리 비슨(Terry Bisson)의 『산 위의 불 Fire on the Mountain』(1988)이나 압두라흐만 A. 와베리(Abdourahman A. Waberi)의 『아프리카 합중국에서 In the United States of Africa』(2006)와 함께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인지적 맵핑에 대한 욕망 자체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완벽한 비율(perfect ratio)’이라는 환상, 다시 말해 자본주의 핵심부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주체가 진정한 정치적 지식과 경험의 가능성을 서발턴의 삶과 투쟁 속에 투사하는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낭만주의에 어느 정도까지 사로잡혀 있는지는 여전히 규명되어야 할 문제다. 이와 관련해 브라질의 비평가 로베르토 슈바르츠(Roberto Schwarz)는 중요한 경계의 목소리를 냈는데, 즉 인지적 맵핑을 단지 ‘핵심부’의 문제로, 마치 후자가 단순히 더 자본주의적이어서 개인적인 것과 정치-경제적인 것, 경험과 추상 사이의 단절에 더 취약한 것처럼 간주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현실이 추상적인 경제 기능들 속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더 이상 그것을 인간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없다. 사회적 분할이 여전히 뚜렷한 옛 식민지에서의 삶의 관찰이 더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성 역시 의심스럽다. 세계시장의 추상은 결코 멀리 있지 않으며, 매 순간 자발적 지각의 충만함을 배반하기 때문이다.”37

따라서 지각과 추상 사이의 단절은 보다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주변부의 착취를 통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불균등성과 지리학적으로 차별화된 형성들에 의해 굴절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단절은 인지적 맵핑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문제에 대해 차별화된 심급들과 부분적인 해결들을 가져온다.38 자본주의적 불균등성이 가하는 전단(shearing) 압력은 형식에 ‘틈’을 만들어내는데,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는 외부의 힘이 지시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끊임없이 균형을 잃는다.’39

자본주의 맵핑 (Mapping capitalism)
책의 동기는 단순하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글로벌 정치경제의 작동을 엿보게 하거나, 혹은 그것의 원거리 굴절을 제시하는 시각적이고 내러티브적인 작업들, 다시 말해 이 ‘숭고’ 시스템 안에서 개인과 집합의 위치를 다루는 작업들에 이끌려 왔다. 이 책은 인지적 맵핑의 미학에 대한 요청에,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들과 산물들이 눈에 띄게 증가한 맥락 속에서 쓰였다. 이를 인플레이션적 호황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특히 설득력 있다고 느꼈던 많은 작업들과, 또는 시사적인 방식으로 실망스러웠던 몇몇 작업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길을 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때로는 하나의 조사서처럼, 때로는 동시대 미학이나 정치, 혹은 그 교차점에 대한 에세이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장거리 협업이라는 제약에 부분적으로 이끌려, 우리 자신의 지도제작이라는 욕구를 자극해 온 작업들에 대해, 그리고 그 작업들로부터 수행된 조사, 논평, 논증들의 집합체와 같은 것으로 구상했다. 이 편람 혹은 파노라마는 동시대 자본의 재현에서 드러나는 부인할 수 없는 규칙성들—공통의 경향, 주제, 장르—에 의해 묶이는 동시에, 때로는 반복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문화 생산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몇몇 비판적 단층선들을 포착하려는 시도로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검토한 작업들은 장르적으로도 상당히 산발적이다. 장르를 초월하는 공포영화 〈울펜 Wolfen〉(1981)에서부터 마크 롬바르디(Mark Lombardi)의 음모론적 그래프들,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 사회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여러 판본의 표지 아트,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일본의 전투적 예술가들이 제안한 ‘풍경론(fûkeiron)’, 멜라니 길리건(Melanie Gilligan)의 비디오 작업들, 그리고 윌리엄 번지(William Bunge)의 지도제작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넓다. 우리는 취향의 변덕과 수용의 우연성에 이끌리기도 했지만, 동시대 자본을 맵핑하려는 관심을 다양한 주제, 방법, 미학적 전략들과 맞대어 시험해 보고자 하는 바람에도 이끌렸다. 우리가 다룬 모든 작업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그들의 현재를 형성하는 사회적 힘들에 관해 시각적이고 내러티브적인 명제를 묘사하고 제시하려는 시도를 공유한다. 특정한 지역에 초점을 맞출 때조차, 아니 특히 그럴 때일수록, 이를테면 데이비드 사이먼(David Simon)의 볼티모어, ‘뉴 토포그래픽스(new topographics)’ 사진에 등장하는 미국 남서부의 산업 단지들, 혹은 휴베르트 소퍼(Hubert Sauper)의 다큐멘터리 <다윈의 악몽 Darwin’s Nightmare>(2004)에 등장하는 빅토리아 호수의 경우에서처럼, 이 작업들은 각자의 매체와 장르의 특수성을 통해 전지구적 자본의 반향을 포착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본의 맵핑 혹은 형상화는 정확성이나 유사성의 문제–그 안에서라면 미적 형식이 지식을 위한 단순한 도구에 불과했을–가 아니라, 생산 양식과 미적 체제 양자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 일종의 힘의 장을 구성한다.

이 서론에서 충분히 드러나듯, 우리는 자본을 재현하는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한 제임슨의 작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이어지는 논의는 인지적 맵핑의 미학을 최근의 과거에 적용하는 작업은 아니다. 첫째로, 우리의 초점이 주로 동시대에 있기는 하지만, 제임슨이 이 미학의 출현을 요청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한 많은 작업 역시 고찰한다. 이를테면, 동시대 시각예술에서의 ‘복합적 보기(complex seeing)’의 구축을 1920년대의 변증법적 몽타주와 연결하는 식이다.40 둘째로, 콜린 맥케이브(Colin MacCabe)의 말처럼, 인지적 맵핑은 제임슨의 ‘가장 덜 전개된’ 범주 중 하나이다.41 미학의 출현에 대한 요청과 그의 작업에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몇 차례의 언급을 제외하면, 그것은 결코 하나의 일관된 미학, 기법, 이론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 물론 이러한 미규정적 상태는 그것의 편재성에 대한 지표이자, 체계화를 자극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인지적 맵핑은 계급의식의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라, 변증법적 비평의 관념, 마르크스주의와 형식의 문제, 사르트르적 총체화의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서구 마르크스주의 비평 정전의 여러 주제들은 이후의 논의에서 공명하겠지만, 우리는 체계화할 수 없는 것을 체계화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제임슨의 공식화가 현재를 사유하는 데 여전히 단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하거나 개념을 내세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미학적, 실존적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기 때문이다. 인지적 맵핑에 대한 문제설정으로서의 이러한 이해는 또한 닐 스미스(Neil Smith)가 1980년대 공간과 문화로의 수렴적 전환에 제기한 날카로운 비판을 따라, 공간적 메타포가 어떻게 ‘강력한 가면’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은유적 공간과 물질적 공간 사이의 개념적 심연을 메우’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요구한다.42

우리가 ‘절대자의 지도제작’이라는 표현에 매료된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시각화하거나 서술하는 문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제작이라는 과학 또는 기술(craft)로서의 지도학은 정확성으로 판단되는 기술적 노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데, 특히 항해 (혹은 더 불길하게는 타겟팅)의 명령이 우리의 생활세계를 포화 상태로 만듦으로써 그러하다. ‘절대자’는 신학적이고, 나아가 철학적인 범주로서 재현을 거부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의 유한한 지각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무한하고 포섭 불가능한 존재다. ‘절대자의 지도제작’은 의도적으로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우리의 사회적이고 경제적 세계를 그린다는 것이 기술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곤경임을 말하기도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일상생활의 종교이자 실제로-존재하는 형이상학이다.

지도제작은 동시대 비판적 예술이 취하는 특권적인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위성항법장치, 구글 지도, GIS로 포화된 더 넓은 문화적이고 시각적인 곤경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굴절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재현은 문자 그대로든 은유적으로든 지도를 매개로 하는 형태로 점점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미술 영역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노팅엄 컨템퍼러리에서 T. J. 데모스(T. J. Demos)와 알렉스 파콰슨(Alex Farquharson)이 기획한 《불균등한 지질학: 미술과 전지구화 Uneven Geographies: Art and Globalisation》(2010), 런던 INIVA에서 열린 《이것은 누구의 지도인가? Whose Map Is It?》(2010)와 같은 주요 단체전이 있었고, 많은 전시와 비엔날레에서의 개별 작업들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43 또한 『예술로서의 지도 The Map As Art』, 『급진적 지도제작의 아틀라스 An Atlas of Radical Cartography』(2009), 『다른/곳의 맵핑: 새로운 네트워크와 영토의 지도제작 Else/Where Mapping: New Cartographies of Networks and Territories』(2006)와 같은 제목들은 지도학적 정치 미학에 대한 탐구와 옹호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예술에서의 이른바 ‘지도학적 전환’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변이들과, 때로는 그것에 맞서는 대항적 움직임들에 대해 진지하고 때로는 전투적인 호기심으로 응답한다. 이 영역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업을 생산하는 예술가들과 집단은, 위치적 투명성에 대한 환상을 좌절시키는 동시에 지리적 재현의 시각적 레퍼토리를 전략적으로 동원하는, 형식적으로 자기반성적인 방식으로 지도학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도 자체가 우리의 서술 곳곳에 점점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는 동시대 예술 실천에서 지도가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현상을 정치적 방향 감각 상실에 대한 만병통치약(panacea)으로 보기보다는, ‘맵핑’이라는 표제 아래 비유적으로 포착되는 훨씬 더 광범위한 문제의 지표로 받아들인다. 지도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페티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가 관계라고 여기는 것들 가운데 일부는 지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혹은 드론 타겟팅과 같은 반사회적이고 반인간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서론을 인지적 맵핑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제시하는 문제점에 대한 경고, 심지어는 부인(disavowal)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지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인지적 맵핑은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지도처럼 간단한 것을 포함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지적 맵핑”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지도와 맵핑의 모든 형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려 해야 한다.’44 이것이 바로 제목에서 두 번째 명사를 강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임슨의 타협없는 헤겔주의적 표현인 절대자(the absolute)는 글로벌 규모에서의 계급 관계의 총체성을 의미한다. 헤겔주의와 계급 분석은 1980년대와 1990년대처럼 배척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유행하는 담론의 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또한 많은 이론가들의 둔감한 귀에 ‘총체성’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최악의 경우 전체주의를, 최선의 경우 편집증적 비평을 연상시킨다. 그 결과 많은 이들에게 총체성은 음모론, 즉 일관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과 지적 지배의 오만으로 타락한 범주가 되었다. 그러나 총체성으로서의 자본주의에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지휘-통제-중심(command-and-control centre)이 존재하지 않는다.45 바로 그 점이 자본주의로 하여금 미학적 문제를 제기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생산·소비·분배의 영역들 사이에 개입하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의 전략적·정치적 매개를 재현하는 방식,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방식들을 요구하는 문제인 것이다. 총체성으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 이론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상상력과 미학은, 반대자들의 시각에서 보기에 과도한 일관성이라는 특징을 지닐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오직 그것이 대상 자체의 비일관성–혹은 모순, 차이, 불균등성–을 덮어버리고, 고도로 인위적인 스타일적, 정치적, 방법론적 장치를 동원한 자신의 이론적 활동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그러하다. 결국 진정한 방향 감각을 획득하려는 시도의 최초의 산물 가운데 하나는 방향 상실이다. 이는 근접한 좌표들이 더 넓고, 때로는 압도적인 전망에 의해 교란되기 때문이다.

원본 도서 Cartographies of the Absolute
By Alberto Toscano and Jeff Kinkle
Zer0 Book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