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NALS: HOW VIDEO TRANSFORMED THE WORLD 시그널즈: 비디오는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가

Michelle Kuo/Stuart Comer 미셸 쿠오/스튜어트 코머

번역 모희

비디오는 어디에나 있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신호와 파장, 데이터 흐름의 형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덧없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끝없이 위치를 잃는다. 셀룰로이드 필름과 달리, 비디오는 즉각적으로 전송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미술 재료들과 달리, 비디오는 전송(transmission)에 의존한다. 즉 기원보다는 목적지에, 동시적 현존과 부재에, 이곳의 이미지가 저곳의 사건을 즉각적으로 중계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1960년대, 비디오는 소비자 기술로서 널리 보급되었지만,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기업 또는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기도 했다. 오늘날 비디오는 전지구적, 사회적, 그리고 상호작용적인 매체 네트워크로서 어디에나 존재하며, 유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 19 팬데믹을 계기로 그 확산이 가속화되면서, 비디오는 의사소통의 지배적인 방식으로 부상했다. 비디오는 이제 우리 손안의 휴대폰과 도처의 화면 속에 자리 잡았으며, 여론을 형성하고, 새로운 공공 영역을 만들어낸다. 밈과 거짓, 증거와 사실, 열정과 권력을 퍼뜨리고, 심지어 혁명을 촉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비디오는 정치의 수단이자 사회적 변혁을 이끄는 주체로서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예술가들은 수십 년 동안 비디오가 갖는 사회적·정치적 효과를 탐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도구와 형식, 사유들을 발명해 왔다. 어떤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민주적 참여와 공적 관여를 유도하고자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상업적·국가적 통제의 증대를 비판했다. 《시그널즈: 비디오가 세계를 바꾼 방식 Signals: How Video Transformed the World》(2023)(이하 ‘시그널즈’)은 비디오, 예술, 그리고 공적 영역에 대한 탐구에 초점을 맞춘다. 이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거대한 변화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렌즈다.

전시는 1960년대1 이래 비디오라는 형식에 깊이 관여해온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방대한 비디오 컬렉션 작품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정보와 허위 정보, 국가적·문화적 차이, 정체성 정치, 경제적 접근성, 사회 불평등 등과 같은 문제들을 탐색하는 다양한 국가의 작품들을 아우른다. 공간과 몰입의 방식을 실험하는 일부 대규모 설치작품들은 분쟁의 풍경과 영토를 탐구한다. 이러한 작업들 속에서, 비디오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매체와 지리적 경계를 넘나든다. 폐쇄회로 TV(CCTV)에서 바이럴 영상으로,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글로벌 사우스(제3세계)에서 월드 와이드 웹으로, 바디캠 영상에서 틱톡 전쟁으로, 그리고 선동에서 설득을 거쳐 대안적 사실에 이르기까지—비디오는 파편화된 채 다양한 시청 환경과 전시 장소, 그리고 소통 방식 사이를 끊임없이 이주하고 분열하며 가로지른다. 미디어가 전례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늘날, 《시그널즈》는 비디오를 하나의 선견지명적인, 생동하는 예술의 흐름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권력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동시에, 그 구조에 도전해온 매체로서 말이다.

우리는 흔히 정치를 정부, 영토, 혹은 군사력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어느 시점부터,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들 또한 정치의 강력한 행위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액티비즘 저널 「래디컬 소프트웨어 Radical Software」의 편집자들이 1970년에 선언한 것처럼, “권력은 더 이상 토지, 노동, 자본이 아니라, 정보에 접근하고 이를 유통시킬 수 있는 수단에 의해 결정된다.”2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이 보여주었듯, 전세계적인 방송 텔레비전의 확산은 국가 건설 및 새로운 형태의 정치권력 형성과 함께 이루어졌다.3 대중매체는 국가와 시장의 통합 과정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요소였다.4 1960년의 에코 1호(Echo I)부터 1962년의 텔스타(Telstar), 1957년의 스푸트니크(Sputnik)부터 1975년 인도의 첫 인공위성 아리아바타(Aryabhata)에 이르기까지, 통신 및 연구용 위성들은 냉전 시대 우주 경쟁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발사되었다.5 1980년대에 이르러 이 위성 시스템들은 전지구적 범위로 확장되었고, 이는 민영화된 미디어와 상이한 지역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네트워크가 등장할 수 있는 새로운 채널을 열어 주었다. 서구 미디어는 국제 시장을 지배하며 세계화와 문화적 제국주의의 도구로 작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서구 외 지역에서도 대안적 네트워크들이 확산되었는데, 예를 들어 마오쩌둥 이후(post-Mao) 중국의 초대형 방송 시스템이나 호주 원주민 텔레비전 콘텐츠의 지역 유통 등이 그렇다. 이러한 통신 네트워크는 균일하거나 매끄럽지도, 혹은 전능하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파편화되고 분산된 다층적인 상태로 존재했다.6 시청자 역시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 수동적인 텔레비전 시청자, 즉 ‘게으른 시청자(couch potato)’나 ‘속아 넘어가는 관객(unwitting dupe)’이라는 진부한 이미지 또한 사실은 클리셰에 불과했다. 관객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마침내 응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저항의 형태, 즉 응답하기를 이해하려면, 관객과 예술가들이 무엇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전후 미술사는 비디오 아트를 텔레비전과의 대립 속에서 설명해왔다. 데이비드 안틴(David Antin)은 “비디오 매체의 형식적·기술적 특성을 정의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텔레비전 산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7 이처럼 비디오와 텔레비전은 적대적인 긴장 관계 속에 있었다. 상업 텔레비전은 비디오의 “끔찍한 부모”였고(Antin), “우리 문화에서 가장 타락한 관습”이라고도 불렸다(Douglas Crimp).8 텔레비전은 사회적 조작과 속임수, 키치를 주입하는 전체주의적인, 하향식 제도로서, 시민들을 무감각하고 세뇌된 자동인간으로 길들였다. 심지어 1961년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이었던 뉴턴 미노(Newton Minow)조차 텔레비전을 “거대한 황무지”라고 불렀다.9 이러한 방송 헤게모니에 맞서기 위해, 예술가와 활동가들은 비디오를 비디오 자체에 대항하는 무기로 삼기도 했다.10

이처럼 비디오를 탐구한 예술가들에게, 이미지는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이미지는 이미 신뢰할 수 없고, 조작된 것이며, 모방된 것, 즉 ‘가짜’로 드러났기 때문이다.11 따라서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방송되었느냐가 아니라, 방송 시스템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신호(The signal)는 는 곧 무기였다. 표현된 내용, 재현된 이미지와 무관하게, 신호 자체가 체제에 맞서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재배치되거나 재구성되어 대안적 소통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나아가 기존의 체제를 전복할 수도 있었다.12 백남준이 선언했듯, “1920년 러시아인들에게 혁명이 전기화(electrification)를 의미했다면, 1960년대의 혁명은 전자화(electronification)를 의미한다.”13

이러한 혁명적 꿈들은 20세기 후반 내내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1965년, 스탠 밴더빅(Stan VanDerBeek)는 그의 특수한 ‘무비-드롬(Movie-Drome)’을 완성했다. 무비-드롬은 구형 돔 구조물로, 관객은 그 안에서 걷거나 앉거나 누울 수 있었고, 고속으로 겹쳐 투사되는 영상들을 통해 내부가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작가가 압도적인 “시각적 속도”라고 부른 이 장치는 이미지의 폭포 속에 관객을 몰입시키는 감각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무비-드롬은 단발성 이벤트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이 장치는 지구 궤도를 도는 위성과 연결되어 이미지들을 저장하고 전송할 수 있는 전지구적 무비-드롬 네트워크의 프로토타입, 즉 “문화 인터콤”의 일부로 구상되었다. 이는 마셜 맥루언의 “지구촌” 개념–미디어 기술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망–을 뒷받침하는 듯 보였다.14 그러나 동시에 반데어비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구촌, 즉 다국적 상업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강력한 헤게모니에도 도전했다. 그는 물리적 공간과 보이지 않는 전파 공간을 동시에 점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경험, 그리고 세상이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대항 공론장이라는 대안적 네트워크 모델을 제안했다. 이는 위계적이고 일방향적인 텔레비전의 전달 체계를 다방향적 피드백과 소통, 교환이 가능한 민주적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존 케이지와 백남준이 꿈꾸었던 “즉각적 국민투표를 통한 전자 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15

반데어비크는 당시 기술로 자신이 구상한 이 대안적 네트워크를 실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2년 후, 소니(Sony)는 전설적인 포타팩(Portapak)을 출시했다. 포타팩은 배터리로 작동하는 비디오 카메라로 휴대가 가능했으며, 기존의 무겁고 값비싼 스튜디오 장비와 달리 훨씬 저렴하고 접근성이 높았다. 이 혁신적인 장비는 소비자들이 비디오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주로 서구 시장을 겨냥해 판매되었지만, 해당 지역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기술을 열광적으로 수용했다. 이렇게 새롭게 접근 가능해진 미디어 덕분에 초기 비디오 아트가 가능해졌고, 백남준에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조안 조나스(Joan Jonas)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기술을 실험의 도구로 삼았다. 마침내, 값비싸고 거대한 기술 자원이 대중의 손에 들어온 듯 보였다. 1960년대 말, 기술과 자원의 민주화를 표방한 반문화 잡지 「홀 어스 카탈로그 Whole Earth Catalog」 의 슬로건은 “도구에의 접근(access to tools)”이었다. 포타팩은 이러한 재분배의 정치를 급진적으로 진전시킨 상징적인 도구였다.

예술가들은 이제 비디오를 직접 촬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신호를 송출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 대부분의 비디오 작품은 송출되지 못했는데, 이는 1/2인치 테이프의 방송 송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인 시도가 있었다. 196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마르타 미누힌(Marta Minujín)은 자신의 작품 <동시성 속의 동시성 Simultaneidad en simultaneidad>(1966)을 아르헨티나의 지역 TV 방송을 통해 송출했다. 이는 예술적 해프닝을 주류 매체에 전략적으로 삽입한 사례였다. (당초 계획했던 베를린과 뉴욕 방송국과의 동시 연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7년에는 보스턴의 WGBH(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기반 공영 방송)와 다른 미국 공영 방송국들이 ‘아티스트 인 텔레비전(Artists-in-Television)’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같은 해, ‘예술과 기술 실험(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 또는 E.A.T)이라는 단체는 CBS와 RCA에 예술가들의 텔레비전 연구 레지던시를 제안했다. 그리고 1968년 오토 피네(Otto Piene)와 알도 탐벨리니(Aldo Tambellini)는 독일 WDR(서독 공영방송)에서 “블랙 게이트 쾰른(Black Gate Cologne)” 방송을 시작했다.16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며, “게릴라 텔레비전(guerilla television)”과 행동주의 비디오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레인댄스 코퍼레이션(Raindance Corporation), TVTV(Top Value Television), 비디오프릭스(Videofreex), 여성 텔레비전 뉴스 서비스(Women’s Television News Service), 비디오 히로바(Video Hiroba) 같은 그룹들은 포타팩을 들고 거리로 나가, 정치 집회와 시위 현장을 가리지 않고 촬영했다. 이들은 또한 대중을 위한 케이블 TV의 공공적 활용을 상상했다. 그것은 미국의 3대 주요 방송국뿐 아니라, 미국의 스털링(Sterling), 텔레프롬프터(Teleprompter), 일본의 도쿄 케이블 비전(Tokyo Cable Vision) 등 케이블 TV의 상업화, 관료화를 상징하는 채널에도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상상한 텔레비전 민주주의는 기존 시스템을 외부에서 교란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했다. 1972년 비디오프릭스가 뉴욕 캐츠킬(Catskills) 지역에 세운 미국 최초의 불법, 무허가 해적 방송국을 보라.17 같은 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은 자신들의 신문에서 “제 3세계 연대”를 통한 독립 케이블 채널 창설을 구상했다고 밝혔다.18 그들은 이 채널을 통해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했다. 케이블 TV와 지역 커뮤니티 액세스 텔레비전(community-access television, CATV)은 지역 시청자와 실험적 방송을 위한 직접 민주주의의 한 형태, 그리고 실험적 방송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도구들은 풀뿌리 해적 미디어(grassroots pirate media), 즉 “방송 텔레비전의 신화적 공론장(mythical public sphere of broadcast television)”을 뒤엎는 대항 공론장의 형성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을 열기도 했다.19 이처럼 포타팩과 CATV는 비디오 매체를 사회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도구였다.20

그러나 비디오를 단순히 상업 텔레비전에 대한 반대항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비디오는 단순히 ‘텔레비전의 타자’가 아니었다. 《시그널즈》는 수많은 전시와 역사 서술에서 구조적으로 작용해온 이 오래된 이분법을 해체하고자 한다. 서구의 기업 방송 텔레비전과 광고의 맥락에서, 텔레비전은 상품에 관한 것, 또는 상품 그 자체였다. 1973년 리처드 세라와 카리오타 페이 스쿨맨(Cariota Fay Schoolman)이 “텔레비전은 사람을 배달한다(Television delivers people),”고 말했듯이, 시청자들은 언제나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자, 소비자인 동시에, 소비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비디오는 자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집트, 동유럽, 중국 등에서 국가 주도 미디어의 등장은 종종 문화부가 아닌 정보부에 의해, CEO가 아닌 관료들에 의해 실제로 기획, 운영되었다.21 이러한 체제들은 시민권과 국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려 했다. 그리고 국가 네트워크의 그림자 아래에서 비디오의 정치는 단순히 반문화적 저항이나 대항적 주체를 생성하는 것을 넘어, 전적으로 새로운 정체성과 주체를 만들어내는 일과 연결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예술가들이 포타팩을 “미디어-아메리카(Media-America)”에 대한 저항의 도구로 삼았던 반면, 다른 지역의 예술가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상상된 공동체”를 구축했다.22

일본의 경우, 포타팩을 만든 회사가 소니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전까지 비디오 장비나 방송 시간에 대한 일반 대중의 접근성은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1972년에 결성된 집단인 비디오 히로바(Video Hiroba)는 정부 미디어가 거의, 혹은 전혀 다루지 않는 소규모 지역사회의 일상을 기록한 비디오를 제작했다. 또 다른 단체인 비디오 인포메이션 센터(Video Information Center)는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재현을 실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규모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비디오를 언더그라운드 운동이나 네트워크 구축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비디오 히로바 공동 설립자이자 예술가인 나카야 후지코(Fujiko Nakaya)의 말처럼 “비디오를 문화적 도구로 활용해 사람들에게 보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다가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23 나카야의 작업인 <미나마타 피해자의 친구들비디오 일기 Friends of Minamata Victims—Video Diary>(1972)는 환경 재난 이후의 사회적 풍경을 포착한다. 이 작품은 미나마타 지역의 화학 공장에서 폐수를 방출해 수천 명을 중독시킨 기업 치소(Chisso)에 대한 집단적 고발이었다. 나카야는 이 치명적인 범죄에 맞서 행동하는 시위자들을 직접 촬영하여 몽타주로 구성했다.24

그녀는 이 비디오를 시위대의 각 교대조에게 실시간으로 재생해 보여줌으로써 서로의 활동을 공유하게 했다. 수십 년 뒤인 1992년,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와 안드레이 우지카(Andrei Ujica)는 <혁명의 비디오그램 Videograms of a Revolution>을 제작했다. 루마니아 혁명에 대한 미디어적 성찰인 이 작품의 전환점은 부쿠레슈티(Bucharest)의 국영 방송국이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던 순간이다. 이때 시위대는 무려 120시간 동안 생방송을 이어갔다. 혁명 당시의 시위와 사건들은 국영 방송을 통해 중계되었을 뿐 아니라, 옥상에서 아마추어 비디오그래퍼들이 촬영한 영상으로도 기록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정부의 검열을 무력화하고, 끊임없는 신호와 새롭게 등장한 가시성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파로키는 이렇게 적었다: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는 단 한 대의 카메라만이 촬영을 감행했지만, 다음 날에는 수백 대의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다.”25

이처럼 비디오는 단순히 TV에 관한 것이거나 TV에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비디오는 감시 국가 자체와도 맞선다. 실시간 신호, 즉 동시 송출이라는 독특한 기술–감시하고 감시 받는 것–은 비디오가 탄생한 이래 가장 강력한 작품들이 기반해 온 토대였다. 초기 비디오 예술가들 중 많은 이들이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사용했는데, 이런 작업들은 흔히 자기 반영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개인 주체의 탐구로 해석되어 왔다.26 그러나 폐쇄회로 영상–모든 것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포착하는 기계적 눈–은 동시에 감시 영상의 근간이기도 하다. 마이클 클리어(Michael Klier)의 <거인 Der Riese>(1983)은 이 거대하고 로봇 같은 시각을 채택하여, 베를린 전역의 원격조정 감시 카메라가 기록한 영상들로만 구성된다. 이 작품은 공공 공간의 점진적인 사유화와 감시적 전환 과정을 기록하면서, 공공성의 개념 자체가 어떻게 붕괴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27 토니 코크스(Tony Cokes)의 <블랙 셀러브레이션 Black Celebration>(1988)은 1960년대 와츠 폭동(Watts riots)을 비롯한 인종 및 사회적 불안의 장면들을 담은 영상 위에, 인더스트리얼 음악 트랙과 팝 가사의 텍스트를 겹쳐 놓는다. 그 결과 작업은 해독 불가능하며 가시성 자체를 거부하는 디스토피아적 뮤직비디오가 되어, 책에 속한 또 다른 글에서 아리아 딘(Aria Dean)이 지적하듯 현대 서구 자본주의가 반(反)흑인성(anti-Blackness)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 작품은 경찰의 바디캠이나 정부의 감시 장비가 시위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전부터 이를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28 물론,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손드라 페리(Sondra Perry)는 얼굴 인식과 생체 정보 감시라는 전지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녀의 작품 <더블 쿼드러플 기타 등등 I&II Double Quadruple Etcetera Etcetera I&II>(2013)은 일종의 훈련장이자 몰입적 공간으로, 포토샵 도구를 재구성하여 흑인 주체를 눈부시도록 화려하면서도 거의 보이지 않게 렌더링한다. 이는 사라지거나 잠적하는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비디오는 능동적인 행위자이자 수동적인 기록 장치로, 각각의 기능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투쟁을 만들어왔다. 21세기에는 소셜 미디어의 영향 아래 새로운 세대의 예술 및 미디어 집단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뭄바이 기반의 듀오 CAMP, 시리아의 아부나다라 컬렉티브(Abounaddara collective), 브라질의 미디아 닌자(Midia NINJA) 등은 페이스북 시대의 팩토그래피를 실천하며 시위, 폭력, 탄압의 장면을 휴대폰 카메라로 직접 포착하고 이를 업로드, 공유함으로써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건들을 다루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온라인상에서 지역적 네트워크와 소규모 커뮤니티를 형성했는데, 이는 뜻밖에도 1980년대 하이메 다비도비치(Jaime Davidovich)의 대항문화적 공공방송 프로그램이나, 2000년대 초 라이언 트레카틴(Ryan Trecartin)의 유튜브 서브컬처와 공명한다. 오늘날에도 정보 공유와 대안적 공론장을 창출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록하고, 때로는 그에 저항하는 광적인 틱톡 영상들에서도 목격된다. 다나 카벨리나(Dana Kavelina)의 서사시적 비디오 작업 <비둘기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a Turtledove>(2020)는 애초에 유튜브 공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작품으로, 2018년 익명의 온라인 영상 <전쟁을 보다 To Watch The War>–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Donbas) 침공을 담은 422개의 영상 클립으로 구성–의 장면 일부를 포함한다. 카벨리나는 “이 영상물 속 증거물들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느꼈다. 나에게 그 공간은 과거와 현재, 정치와 개인적인 것 사이의 대화를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29 작가는 이 파운드 푸티지, 1930년대와 1970년대 돈바스 지역의 아카이브 영상, 그리고 서정적인 드로잉, 애니메이션, 시구 등을 엮어 다성적이고 집단적으로 저술된 평화의 청원을 만들어냈다.

소셜 미디어의 혼란스럽고 층위화된 공간들처럼, 현실 세계의 물리적 환경 또한 극도로 불균질한 지형, 즉 하나의 “미디어 스케이프”가 되었다.30 첨단 정보 회로가 낙후된 물리적 인프라 안에 존재하고, 소규모 미디어, 불법 복제 비디오, VPN 터널 등이 국가가 후원하는 통신망을 침투하거나 회피할 수도 있다. 미디어 이론가 라비 순다람(Ravi Sundaram) 은 이러한 조건을 일종의 “해적 근대성(pirate modernity)”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31 《시그널즈》는 이러한 가상적·건축적 경험의 서로 다른 층위들을 맞세운다. 티파니 시아(Tiffany Sia)의 작품 <네버 레스트/언레스트 Never Rest/Unrest>(2020)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유리창 앞 가로 바 구조물에 매달린 모니터를 통해 상영되는데, 이 설치 방식은 아이폰으로 촬영한 영상의 화면비와 미술관 건축의 수직성을 대비시키는 효과를 준다. 시아의 실험적 영상은 2019년 홍콩 시위를 대안적인 방식으로 기록한 르포르타주를 제시하며, 손에 쥔 카메라의 낮은 해상도와 불안정한 시선은 억압과 은폐로 뒤덮인 도시에서 국가 감시망을 피해가는 전략으로 작동한다. 러시아 작가 집단 슈토 젤럿(Chto Delat)의 <배제된 자들, 위기의 순간에 The Excluded. In a Moment of Danger>(2014)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체제 인사로서 공적 삶과 발언의 장에서 배제된 자신들을 위해 준건축적(quasi-architectural) 공간을 구축한다. 그들은 “공적 공간의 잔재마저도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더이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단이 없다. 우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들리지 않고, 배제되며, 목소리의 합창에서 잘려나가고 있다.”고 읊조린다. 이 설치 작업은 러시아 혁명가 이폴리트 미쉬킨(Ippolit Myshkin)의 연설을 바탕으로 한 다성적 합창이 담긴 비디오로 관객을 둘러싸며, 극장이자 피난처, 정보 채널이자 선동적 탄식의 장으로 기능한다.

2022년 현재 시점에서 보면, 과거의 비디오가 품었던 혁명적 꿈–참여형 네트워크, 다방향적 소통, 정보의 민주화와 탈중심화–은 모두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소셜 미디어로서의 비디오는 전례 없는 공적 영역의 확산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공적 영역을 수많은 틈새 집단으로 분열시켰고, 정치를 무한한 반향실(echo chambers)들의 연쇄로 원자화시키기도 했다. 모든 상황이 우리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32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이 지적했듯, 새로운 유통과 복제의 형식은 새로운 통제 방식을 낳았고, 정보의 분산은 권력의 재분배로 이어지지 않았다.33 20세기 대중문화를 통한 정보의 하향식 전파는 이제 극단적으로 다양화되고 파편화되었다. 응답하기–피드백–는 단지 시스템에 흡수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그 자체로 시스템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것은 시스템을 훈련시키고, 규제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오류와 글리치조차 즉시 통합된다. 그 결과, 새로운 권위주의의 목소리들은 시스템을 과부하시키고, 모든 신호를 소음으로 뒤덮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의 소란은 인터넷의 은밀한 영역과 권력의 복도에서 흘러나와 미디어 장치를 타고 급격하게, 기괴하게, 바이러스처럼 증폭된다. 가짜와 유출, 허구들이 회로를 뒤덮고, 비디오 증거는 너무 자주 그 속에 잠겨버린다. 만약 우리가 이 소음을 뚫고 살아남아 새로운 공론장과 정치, 공동체의 형식을 찾고자 한다면, 이 책의 예술가들에게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법을–그리고 어쩌면 세계를 바꾸는 법을–거듭해서 보여준다.

원본 도서 Signals: How Video Transformed the World
Edited by Stuart Comer and Michelle Kuo
Contributions by Aria Dean and Erika Balsom
MoMA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