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ng Image Desk를 시작하며

황지원
저는 영상문화학을 전공하고 미술계에 진입했어요. 물론 다른 매체들도 각자의 특수성이 있지만, 영상을 전공한 입장에서 볼 때 미디어 기기를 활용하는 영상 전시는 회화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매체와는 분명히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 전시 기획 과정에서 영상 매체의 특수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체계를 접하기 어려웠어요. 영상 설치를 담당하는 외부 용역에서 일부 전문성이 확보되지만, 내부 기획 단계에서는 매체 특성이 충분히 다뤄지지 못해 결국 개인의 재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체감했어요. 영상 전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업무를 수행하는 코디네이터로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이대로 미디어 공부를 놓게 되면 끝없이 멀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반적인 전시 관련 이야기가 아니라 영상 매체를 공부하고 계신 분들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그래서 안면식도 없는데 여러분들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영상 작업을 하시는 장영해 작가님, 영상 관련 논문을 쓰신 모희님, 그리고 영상에 대한 글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임현영 선생님에게 연락해서 미디어 스터디를 제안했죠. 작은 단위에서부터 매체의 특수성에 대해 함께 논의해보는 것이, 이후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서도 이러한 담론을 다룰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장영해
너무 좋은데요. 예전에 〈레이 Ray〉 상영 끝나고 OO랑 OO랑 저랑 현영님이랑 같이 카페 갔었잖아요. 그때 현영님이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동료가 많이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황지원
저만 솔직한 걸 수도 있는데... 아무튼 그 뒤로 제가 다 연락드렸던 것 같아요.

임현영
방금은 작년 네마프에서 상영했던 〈레이 Ray〉를 이야기한 거고, 지원님이 저희를 소환한 건 그 전인 것 같아요.

황지원
아, 저는 영해 작가님 2024년 개인전 보고 이후에 작가님한테 연락했었죠. 그때 논문 쓴 지 2년도 지났을 무렵이고. 당시에도 영상 전시에 있어서 그 특수성을 알고 있는 분과가 하나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가 처음에 선생님들한테 스터디 같이 하자고 제안 드렸을 때랑 25년도 때 『지각의 정지』 끝나고 올해 다음 텍스트로 뭐 읽고 싶은지 정리해서 보내드렸던 적 있는데 혹시 기억하실까요?

모희
미디어 지형도요.

황지원
오류가 많은 지형도지만, 당시 제 머릿속에 있는 지도였거든요. 제가 대학원에서 혹은 개인적으로 읽고 관심있는 것들을 정리했어요. 이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잖아요. 저는 이런 지형도로 미디어 세상을 보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떠한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25년도에 제가 보내드렸던 자료는, 무빙 이미지의 개념적인 부분들을 그냥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거 말고 어떻게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 비평적인 고민이 담겨있는 자료인데요. 매체 관련한 최신의 담론들과 큐레이터로서 전시 사례들, 특히 국내 말고 해외 전시 사례들이나 해외 연구 논문을 같이 보고 싶었어요. 영어 자료를 혼자 보기 너무 힘드니까 그걸 같이 번역하면서 볼 동료들이 필요했었던 것 같아요. 스터디에서 다루고 싶었던 내용은 대략 이렇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희
저는 《시그널즈 Signals》 도록 읽을 때 재밌었어요. 재밌었던 이유는 전시 사례나 현장에 대한 이야기라 그랬던 것 같아요. 대학원 때 읽었던 텍스트들도 이론 위주이다 보니 사례를 다루는 텍스트를 볼 기회가 많이 없었거든요.

황지원
그러니까요. 실무적으로 일에 투입이 됐을 때, 실무와 이론의 격차를 엄청 느끼면서도 그래도 그 격차를 잘 완화시키는, 본받을만한 전시 사례 같은 것들을 보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고.

임현영
지금 다른 질문이랑 섞여서 진행이 되고 있기는 한데요, 예를 들어 《시그널즈 Signals》 같은 경우에는 해외 미술관 사례고 모마의 소장품 위주로만 구성되었던 전시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가 이런 해외 사례를 공부를 하는 목적은 그것과 부합하는 국내 사례가 있는지 없으면 약간 왜 없는지 왜 국내 환경은 그게 불가능한지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어야 되는 것 같거든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있었던 그 미디어 기획전 같은 거 있잖아요.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라는 전시도 있었고. 국내에도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리고 물론 미디어 소장품이 해외만큼 양적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게 이유겠지만 《시그널즈 Signals》 같은 전시가 이루어 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아직도 좀 궁금하기도 해요. 또 한편으로는 저희가 전시 사례 분석은 많이 봤는데 작품 하나를 깊게 분석한 사례를 또 많이 보지는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고요. 물론 저자들이 연구자나 큐레이터로서 의미 있고 예리한 글을 많이 쓴 건 맞지만, 또 한편으로 저의 생각에는 작가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 작가한테 이 매체가 필요한지 당위의 문제를 다루는 글은 많이 접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말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글이 해외도 국내에도 없다. 그나마 국내에서 접하는 글의 경우에는 서문이나 리뷰나 비평 등 한 작가의 작업이나 작가론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해외 작가의 작가론이나 비평을 아직 스터디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니까.

황지원
평론이라고 했을 때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저한테 어떤 관례로서는 『지각의 정지 Suspensions of Perception』랑 지금 다루고 있는 『절대자의 지도제작 Cartographies of the Absolute』이라는 두 책이 큐레이팅보다는 영상 매체의 존재론적인 특성을 좀 더 이해하게끔 하는 부분으로서 연구에 가까운 책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영화 비평 쪽에는 시네필이라든지, 정말 자기만의 세계와 색깔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글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무빙 이미지 관련해서는 그 결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요. 관련 비평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임현영
왜냐면 저희가 영화 스터디 혹은 필름 스터디가 아니라 미디어 스터디라서, 정보전달과 소통을 기반으로 한 매체라는 지점에 중심을 두고 무빙 이미지의 생성과 유통과 그 자체를 메타적으로 보는 글들을 계속 다뤄왔잖아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은 어떤 한 작품을 바라볼 때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기보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로써 보면서 미디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같이 사유한다는 점인 것 같아요. 정신분석학도 보고, 사회학도 보고, 맑시즘도 최근에 보고 있잖아요. 영화학 연구처럼 장면 하나하나 뜯어보거나 한 작가의 전반적인 경향을 파악하기보다는 좀 거시적으로 접근을 해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얘기를 굳이 왜 하냐면 저희가 ‘미디어’ 스터디라는 점을 좀 강조하기 위해서. 필름 스터디도 아니고 시네마 스터디도 아니고.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글들을 봤었는데, 그 관점들이 다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중복된 주제들이 많았잖아요. 이것을 굉장히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 저희가 다룬 첫 글인 것 같아요. 에리카 발솜의 「현실 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 이 글에서부터 출발해서 사실과 재현의 문제를 지금까지 계속 다루고 있잖아요. 왜 이런 방향으로 흘러오게 됐을까요?

황지원
솔직하게 말하면 제 중심 질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웃음) 저도 그 질문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결국 계속 그 자리로 돌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동시대에서 영상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가 개인적인 연구 주제가 된 것 같습니다. 「현실 기반 공동체 The Reality-based Community」 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와 논바이너리 시네마 Hybrid Documentary and Non-Binary Cinema」도 저는 재밌었거든요. 이 글도 현실, 사실, 허구의 관계성을 (여전히) 탐구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자체의 성질에 관한 글이고, 다큐멘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2010년대 이후 최신 다큐멘터리 사례들을 분석하잖아요, 결국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현실’이란 무엇인지 다시 질문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우리 모두가 미디어를 경유해서 현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이해하려면 결국 미디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희가 필름 스터디가 아닌 미디어 스터디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게 된 것 같고. 이랬을 때 정치, 경제, 사회학적인 부분이 자연스럽게 포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희
스터디 하면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느낀 부분은, 그렇게 포괄적으로 하다 보니까 거시적으로 이미지를 어떻게 독해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인데요. 그러한 점에 있어 『지각의 정지 Suspensions of Perception』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동시대 미디어 환경 안에서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신체의 자리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신체와 더불어서 문화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우리의 의식에 대해 고찰을 할 수 있게 해줬던 것 같고. 우리가 어떤 미디어를 경유해서 바라보는 현실 또는 지각하는 현실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고정된 신체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됐던 것 같아요. 책이 다루는 ‘주의’가 ‘19세기 전환기’라는 시대에 한정되지 않고 오늘날 더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동시대의 지각과 시각을 탐구함에 있어서도 충분히 유효한 텍스트인 것 같습니다.

임현영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끼리 더 합의하거나 생각하고 넘어가야 될 지점은 ‘미디어’, ‘무빙 이미지’, ‘영상 매체’라는 용어에 관한 것인데요. 저희가 2년 넘게 스터디를 해오면서 이 용어나 개념들에 대한 직접적인 합의를 한 적이 없고 다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오늘날 이런 개념들을 굳이 정의하지 않아도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일단 모든 게 이미지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생각하는 미디어, 즉 매개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와 이미지의 움직이는 이미지로서의 무빙 이미지는 존재론적으로 다르거든요. 모두 디지털 신호로 이루어진 비물질적인 것들이지만 하나는 매체의 물질적 차원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면 무빙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각적인 작용을 일컫는 측면이 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용어들 사이의 경계나 각각의 정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했고요. 이런 논의가 요즘에 소모적이라는 생각도 들긴 하거든요. 사실 복잡해진 매체 환경 아래서 이제는 영화와 미술을 제도적으로 구분하는 방법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영화 쪽에서 부르면 영화고 미술 쪽에서 부르면 미술인데. 그래서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빙 이미지로 부를 수 있느냐, 무빙 이미지가 뉴미디어랑은 또 어떠한 포함 관계에 있느냐, 이런 것들을 논의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황지원
그런데 사실 저는 개념 정리를 이미 포기한 것 같아요. 예전에 논문 쓸 때는 확실히 개념이 중요하다 보니까 그때 한창 했다가.

임현영
알려주세요 좀. (웃음)

황지원
저도 잘은 몰라요. 더군다나 실무에서는 그렇게 정밀하게 쓰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입장에서 ‘뉴미디어’를 안 쓰는 이유는 ‘뉴’의 함의가 너무 많이 변했고. 무빙 이미지의 개념은, (이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영화랑 영상 전시에서의 영상 작업을 포괄해서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것 같아요. 일반 영화까지 포괄해서. 물론 서사가 포함된 극영화를 이야기할 때는 영화라고 부르긴 해요. 그렇지만 어쨌든 경계에 있는 대상들이 제가 주요하게 탐구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무빙 이미지, 혹은 영상이라는 단어를 평소에는 많이 쓰는 것 같아요. 특히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때는 영상이라는 명칭으로 통일을 하고요. 미디어라는 용어는 물질적인 장치, 그러니까 모니터나 빔 같은 장치를 전부 포함, 환경, 감각 구조, 사회적 관계까지 이야기할 때 쓰게 되는 것 같고요.

모희
미디어가 그 단어들 안에서 제일 맥락이 넓은 것 같아요. 갑자기 든 생각인데, 영상 작업하시는 작가님들이 본인 소개하거나 작업에 대해 설명할 때 무빙 이미지라는 단어를 은근히 잘 안 쓰시지 않나요? 다들 영상이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건 왜일까요?

황지원
그러게요.

모희
무빙 이미지라는 단어는 비평에서 주로 보이는 것 같고.

장영해
맞아요. 영화까지 포함했을 때 더 그렇고요.

황지원
그래도 영상 작가분들 중에 영화계까지 염두한 분들은 무빙 이미지라는 단어 그래도 좀 쓰지 않나요? 시각예술분야에서 전시로서의 영상만 고려하시면 영상이라고 지칭하시는 것 같은데, 극장이나 영화제에 출품까지 생각하시는 경우 무빙 이미지라는 단어도 사용하시는 것 같아요. 작가님마다 너무 다르고, 비평가 개인마다 너무 다르고 배워온 경로가 너무 달라서 하나로 환원할 수 없기는 하지만.

장영해
확실히 영화제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무빙이미지라는 단어를 더 친숙하게 쓰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동의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각 작가들이 홈페이지 자기소개에 무빙 이미지라는 단어를 사용한 경우를 본 적이 드문 것 같아요. 대부분 영상이나 비디오 한다고 하지. 무빙 이미지라는 용어는 영화의 역사를 의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건가 싶더라고요.

황지원
저희 스터디에서 다루는 영역은 전시되는 영화나 영상에 제한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블랙박스에서의 이미지들도 해당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무빙 이미지, 영상, 미디어라는 단어가 중심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장영해
제가 작가여서 그런지, 이렇게 경계를 나누는 게 항상 신기했거든요. 저는 경계를 나누고자 한 적은 없고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게 어떤 경계에 들어가는지만 신경을 썼으니까. 왜 이렇게 토론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가, 저는 그럴수록 구체적인 예시들을 생각하면서 이 예시가 어떤 경계에 있는가 하고 역으로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기서 왜 이 사람은 왜 무빙 이미지이라는 말을 썼을까, 왜 영상이라는 말을 쓰고 왜 여기서는 장치 개념(apparatus)을 포함한 미디어라는 단어를 썼을까 하고 질문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이 스터디가 저에게 어떤 배움을 주었는지를 되돌아보자면, 무빙 이미지가 보여지는 환경과 현장에 대해서 이론과 함께 논의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영화가 보여지는 환경, 무빙 이미지가 전시되는 현장 등 설치(installation)의 방식이 해당 작품을 어떻게 습득하고 이해할 것인지 결정하고는 하는데, 이를 공적으로 다루는 글, 장을 많이 접하지 못했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지각의 정지 Suspensions of Perception』 얘기하셔서 생각이 난 건데, 그렇게 시차를 가지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글들을 지금 읽는 게 저는 좋아요. 시차가 얼마나 효용성 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시차를 무시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글을 읽으면서 보이잖아요. 지금 영화나 미술관에서 틀어지고 있는 작품들에 그 시차를 매개로 과거의 이론이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가 실제으로 느껴지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거든요. 물론 그렇게 적용되는 그런 중요한 작업들은 몇 개 없겠죠. 몇 개 없겠지만 그래도 그걸 찾으려는 의지 같은 것? 항상 아방가르드와 관련한 비평을 읽으면 현장에서 작동하는 작업들과 비평 간에 상호 교환보다는 일방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서, 그래서 이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 경우도 많고, 오히려 글이 좋은데 작업이 글을 대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를 화두에 두고 시차를 가진 고전의 글들을 읽는 것이 좋았습니다. 제가 특정한 매체의 역사 같은 거를 반추하는 걸 작업적으로 좋아하기도 해서.
이건 다른 이야긴데 얼마 전에 들은 페리지 갤러리 강의 때 유운성 선생님이 AI 이야기를 하셨던 적이 있어요. 마음대로 축약해보자면 요즘 AI에 대해서 이미지의 종말이다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지만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를 이해하기 어렵다(내용이었는데).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그랬고, 새로 등장한 매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벌써부터 내세우는 것에 대해 오히려 자문을 해봐야 되지 않냐, 실제로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 넘어갔을 때의 논의들 하고 비슷한 논의들이 지금 나온다는 거예요. 웃기기도 하고, 너무 공감이 됐어요.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 AI라는 말 지겹기도 해요.

임현영
그래서 프롬프트 기반 이미지 생성술이라는 용어를 쓰셨잖아요. (웃음) 관련해서 저도 첨언을 하자면, 근래에 재미있게 읽었던 글 중에 오래된 바쟁의 1950년대 글이 생각나는데요. 바쟁이 1950년대에 텔레비전의 미래에 대해서 예견한 글인데, 맨 처음에 영화가 나왔을 때 영화가 유성이 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텔레비전도 이제 막 출시되어서 각광을 받고,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에 지금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사실 종말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텔레비전은 굉장히 느리게 발전할 것이고 영화와 같은 주요한 예술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었거든요. 지금 보면 맞는 말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텔레비전은 컬러의 도입이나 화질 개선 등 발전을 이루기는 했지만 어느 선 이상으로 물질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저는 들거든요. 외형도 그렇고, 이미지가 전달되는 방식도 그렇고. 또 로셀리니랑 르누아르랑 바쟁이 텔레비전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 나눈 내용을 담은 인터뷰도 있어요. 그런 감독들은 텔레비전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더라고요. 영화관의 관객이 군중 심리를 지닌다면 텔레비전의 관객은 개인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고, 그 친밀함은 바로 영화의 거대 서사가 잃어버린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카메라가 처음 발명됐을 때나 인터넷이 처음 발명됐을 때 영화라는 매체가 종말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지만, 결국에는 그 매체에 대한 노스탤지어랄까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어떤 휴머니즘적인 본성 때문에 계속해서 종말을 맞지 않고 생존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런 현상을 보면 과거의 관점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각의 정지 Suspensions of Perception』에 나오는 예시들의 경우에는 동시대의 기술 매체가 아니잖아요. 오히려 마네의 페인팅이나 초기 광학 장치, 칼레이도스코프 같은 원시적인 형태의 기구들을 예로 들고 있는데요. 그러한 근대의 예시들이 동시대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의 시각 경험은 과거의 시각 경험의 누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살펴보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황지원
맞아요. 저는 특히나 뭐든지 거시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아요. 『지각의 정지 Suspensions of Perception』는 근대적 주체가 경험한 파편적인 시각 문화를 매체의 변화, 그리고 인간 본연의 생리학적, 주관적 감각의 변화와 연관해서 설명한 글이잖아요. 크래리가 『관찰자의 기술 Techiniques of the Observer』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치기는 하는데, 그 책에서는 1900년대와 1800년대 시각 변화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서 객관적 관찰로부터 주관적 체험으로 시각이 변화하는 양상을 다루거든요. 이 책을 보면서도 주체의 시각이 근대라는 시간성 안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나라와 대조해보면 근대를 소화한 절대적인 기간이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짧기도 하고 자생적인 변화가 아니다보니 서구 사례에 기대서 지각 과정의 변화를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던 것 같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면, 원래 MTV가 나왔을 때도 MTV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잖아요.

임현영
비디오 킬 더 라디오 스타(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도 있었죠. 근데 정말 예상 외로 MTV가 먼저 망했다는.

황지원
저는 이 문제가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해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화들 중에 결국 인간의 일상적인 루틴 안에서 감당 가능한 것들, 다시 말해 생리적인 조건과 자본주의적 논리가 뒤섞인 환경 속에서 효율이나 합리성과는 별개로 살아남는 것들만이 지속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 영화관도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죠. 비관적으로 본다면 특정 계층만의 향유 시설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굳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더 보편화될 수도 있겠죠. 저 역시도 오히려 모니터, 노트북 심지어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게 익숙해져 가고 있어요. 봐야할 영상들이 너무 많은데 매일 2-3시간씩 블랙박스에 있을 수가 없거든요. 또 이제 태어나는 세대는 인공지능을 거의 전제 조건처럼 접하게 되고,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자체에서도 인공지능의 존재 여부가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영해
지원 님께서 그게 논리나 이성의 관계가 없다고 했잖아요. 오히려 저는 그게 자본주의 논리랑 더욱 가깝다고 느끼거든요. 사람들이 소비할 거리가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 노스텔지어 때문에 소비를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그런 감성적인 부분까지 포섭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흥행한 브랜드를 떠올려보면, 애플도 그렇고 레드불도 그렇고 모든 슈퍼카 브랜드들도 그렇고 어떤 감정적인 면 때문에 소비를 하게 되는 거잖아요. 최근에 소비자 행동론 책도 재밌게 읽고 있는데, 예를 들어 사람들이 애플의 30만원 짜리 무선 이어폰을 살 때, 원래는 테크 쪽에서만 유명하고 일반 사람들은 비싸서 잘 사지 않는 제품인데 어느새 이미지를 보고 대중적으로 흥행한다는거죠. 간접적인 소비의 형태로. 결국 기호자본주의의 체제 안에 들어가는. 매체도 되게 유사하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요즘 대부분의 소비는 이런 기호자본주의의 전형성 안에 있는 것 같아요.

황지원
말씀하신 내용이 지금의 소비문화를 대변하고 있다면, 저는 그 문화가 또 어디로 흘러갈지 그 저변에 있는 다양한 매개변수들을 통해서 유추해보고 싶은 것 같아요. 변화의 척도들이 무엇인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척도들이 궁금해서 공부를 하다보니까 저희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영향을 준 프레데릭 제임슨(Frederic Jameson)까지 관심이 이어진 것 같아요. 제임슨은 맑시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맥락 속에서 종합적으로 사유하는 이론가이기 때문에, 요즘 제게 가장 중요한 참조점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역사성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노스탤지어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죠.

임현영
네, 제임슨 같은 맑시스트가 봤을 때는 노스탤지어적인 작용, 그러니까 미래의 감각을 과거에 전향하는 반동적인 작용에 의해 현대의 영화가 감정적인 산물로만 남는 것이 굉장히 비판할 지점이잖아요. 더 과거로 돌아가면, 영화를 포함해 기술 발전이 감각구조의 발전을 이끌었을 때 그 발전이라는 것이 굉장히 양면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기술적인 충격을 통해서 민중을 해방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그것이 파시즘의 도구로 악용되거나 기술적 합리성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대상을 배제하는 경우가 있었죠. 부정적인 측면에서 영화가 노스탤지어적으로 남는다고 한다면, 후자와 연관해서 그것이 대중을 그저 무비판적인 소비자로 호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역사적인 시간을 평평하게 낭만화해버리는. 즉 소비주의의 시간으로 바꿔버리는 거죠.
제가 이번에 진행했던 인디스페이스에서의 상영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상영회를 준비하게 되었던 기저에는 영화의 존속과 관람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구가 자리하는데요. 단순히 내가 재미있게 본 영상을 당신도 재미있게 보라는 의도가 아니라, 조금은 더 비판적으로 보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지만 어쨌든 본질은 관람이라는 공동의 경험에 담긴 정치성을 감각하자는 것이었거든요.

황지원
저는 직업적인 측면에서도 큐레이터라기보다 프로그래머에 가까워진 형태를 경험하면서, 전시로서의 영상 작업을 다루는 일과 블랙박스 안에서의 프로그래밍은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데요. 전시는 관객의 동선부터 공간에 속한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 디자인되지만, 블랙박스를 위한 상영 프로그램을 짤 때는 타임라인에 근거해서 기획하는 것 같아요. 저 나름대로 배치의 맥락을 만들면서 타인이 실제로 상영회를 보며 왜 이 순서인지 알아챘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프로그래밍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배열하는 행위라는 건 이 일을 실제로 경험해본 사람만이 체감할 수 있는 일 같기도 하고요. 요즘에 상영 프로그램 기획을 개인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잖아요.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영상 매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와 논바이너리 시네마 Hybrid Documentary and Non-Binary Cinema』라는 글로 잠깐 넘어가자면, 이 글 역시도 기획자가 아니라 루크 무디(Luke W. Moody)라는 프로그래머가 자기가 봤던 프로그램 영화제에서 봤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수없이 분석하고 설명한 글이잖아요. 반면에 마크 내쉬(Mark Nash)가 쓴 『무빙 이미지를 큐레이팅하기 Curating the Moving Image』는 앞의 글과는 엄청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두 글 사이의 간극이 큐레이팅과 프로그래밍의 간극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제가 작년과 올해 들어서 가장 많이 체감하고 있는 게 이 지점이어서. 영화제 시스템과 미술관 시스템 사이에 존재하는 극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어요.

임현영
그러네요. 아무도 이 글은 기억을 못 하실 것 같은데, 이것도 에리카 발솜(Erika Balsom)이 썼던 글이거든요. 제가 발제했는데, 『페미니스트 월드메이킹과 무빙 이미지 Feminist Worldmaking and Moving Image』이 글은 어떠셨나요?

황지원
그때 한옥희의 〈무제 77-A〉로 시작했죠.

임현영
네, 한옥희로 시작한 인트로덕션을 포함해서, 트린 티 민하(Trinh T. Minh-Ha)가 쓴 「바깥이 안이고 안이 바깥이다Outside In Inside Out」라는 글도 번역을 했었는데, 번역이 좀 미흡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에 있는 글들을 발제하면서는 에리카 발솜이 원래 이렇게 페미니즘 의제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다른 글도 찾아봤었는데요. 크리틱-칼에도 이미 번역본으로 올라와 있던 크리티컬에도 올라와 있던 「여성적 응시를 찾아서 In Search of the Female Gaze」라는 글이었거든요. 생각보다 오역이 조금 있어서 혼자 다시 원문을 보면서 정리하던 중에 무빙 이미지에 있어서 여성적 응시,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동시대의 실천에서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영화학에서는 스크린이론 등장과 더불어 멀비에서부터 존스턴, 매리 앤 도앤으로 내려오고 로레티스로 이어지는 계보랄까, 어떤 흐름이 존재하는데, 이제는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작가님은 어떠세요? 혹시 하실 말씀 없으실까요?

장영해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당연한 말이지만 박찬욱 감독이 레즈비언 영화를 찍었다고 그가 레즈비언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미술계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이 작업과 직결되는 경우가 꽤나 많다보니 어떤 작업이 그 자체로 다뤄지기보다는 그것을 만든 작가에 관한 설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러한 경향이 우리가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칭하는 분야에도 적용이 되고. 다만 저는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페미니즘적 논의와 현대 미술에 있어 페미니즘적 논의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보는데, 저는 후자에 방점을 두다보니...

황지원
저도 작가님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영화, 그리고 크게 보면 예술 자체가 남성적 주체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었잖아요. 이미지라는 것 자체가 그것을 만든 이의 시선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보는 대다수의 이미지는 남성 중심적으로 구축된 역사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봐요. 이처럼 평균적인 시선이 남성적 시선이다 보니, 이를 그대로 습득하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특정 이미지가 무엇을 어떻게 대상화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저는 페미니즘적 시각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작품을 볼 때 그러한 시도라는 것이 이미지를 통해 보이면 그렇게 명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말로써, 단어로써, 개념으로써 명명할 필요도 분명히 있죠. 그런데 아직 더 배워야 할 부분으로, 페미니즘 안에서도 많은 갈래들이 있고 우리가 주로 배우는 서구의 페미니즘과 동아시아의 페미니즘은 그것이 탄생한 사회적 구조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현영
그러니까요. 제가 읽었던 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일단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오해를 유발할까봐 자꾸 텍스트에 기대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점을 양해부탁드리고요. 아까 말씀드린 발솜의 「여성적 응시를 찾아서 In Search of the Female Gaze」로 돌아가면, 저자는 결국 남성적 응시 개념에 대응할만한 여성적 응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여성적 응시라는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순간 그것은 또다른 본질주의로 귀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거든요. 발솜이 이리스 브리(Iris Brey)라는 프랑스 이론가의 견해를 비판하는데, 브리는 여성적 응시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여섯 요건을 말해요. 마치 그리드 판처럼, 빙고처럼 그 요건들에 부합하면 여성적 영화가 되는 건데. 사실 이에 완벽하게 대응하는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찾자면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정도? 그러니까 그리드에 각각의 영화를 통과시키면 셀린 시아마 영화는 스무스하게 통과하겠지만, 다른 웬만한 영화들은 교과서적으로 들어맞지 않을 거라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가 여성적 응시가 아닌 것도 아니고, 나아가서 남성이 만든 영화라고 여성적 응시가 개입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요. 결국에는 정말 복잡한 역학관계가 시선과 응시에 있는데 그걸 특정한 지표로 단순화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생각이고요. 다만, LGBTQ 영화의 경우에는 당사자성이 보다 중요한 판단 요소이지 않을까요. 퀴어 당사자 본인만이 퀴어를 이야기하고 그 삶을 재현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고, 그러한 지배적 분위기를 깨기 어렵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황지원
저는 사실 조금 혼란스럽기는 한데, 개인적으로 작업이 자기 반영성만을 가지고 있다던지 등 일기장 작업의 일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작업들에 크게 흥미가 없고, 오히려 작업이 속한 거대한 체제를 조망하는 일에 관심이 있거든요. 이 때문에 남성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서문을 비교적 문학적인 방식으로 썼을 때, 그것이 여성적 시각이 반영된 글쓰기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는 것 같네요. 이런 점에서 단지 문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실천을 곧바로 ‘여성적 글쓰기’로 규정하는 그 관점에 의문점이 있는 것 같아요. 즉, 스타일이나 형식만으로 어떤 실천을 규정해버리는 방식 자체에 의문인 거죠. 그래서 저는 가능하다면 ‘여성적’이라는 범주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대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도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 방식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장영해
수동 공격은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쓰는 방법인 것 같긴 해요. 다시 말해서 유효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상이 수동 공격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정도로 시간을 들여서 작품을 보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거.

임현영
그러니까 능동 공격을 해야 된다. (웃음)

황지원
그러면 또 프로파간다라고 비판하겠죠? 저는 항상 프로파간다에 관심을 가져왔거든요. 세상이 너무나 잘못된 것 같다고 느끼지만 그에 대해 제가 하는 말이 선동이 되는 건 원치 않고, 그렇다고 침묵을 하고 싶지도 않을 때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돼요.

임현영
정치성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조금 다르게 보면 선동에는 다른 선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너무 위험한 발언인가요? 현실적으로 프로파간다 없이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잖아요. 이미 우리는 매일같이 프로파간다를 마주하고 있고, 그러한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게 오히려 문제인 거죠.

황지원
맞아요.

임현영
아무튼 저도 그 프로파간다와 미술을 구분하자는 주의이고, 스스로도 액티비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서 잠깐 오프 더 레코드 할까요?

(OFF)

황지원
다시 동시대의 노스탤지어 문제로 넘어가서, 요즘에 노이즈 섞인 화면들이 유행하고 있는데, 단지 미술계 뿐만 아니라 상업 씬도 마찬가지잖아요. ‘Y2K’ 미학이 유행하면서 당시 20세기 후반의 투박한 질감을 스크린 상에서도 많이 보게 되는데요. 저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역사를 망각한 채로 레트로를 소비하려는 경향을 비판하는 이론을 주로 접해왔는데, 심지어 그런 이론을 같이 공부하고 소화한 분들도 레트로를 컨셉으로 하는 아이돌 산업에 굉장히 열광하시고, 그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임현영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이 드실 수도 있는데, 아이돌 시장은 정말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키는 느낌이랄까요.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황지원
그래도 적어도 분리는 필요한 것 같아요. 이들의 상업적 성공과는 별개로, 어떠한 미적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떠한 권력구조가 그 배후에 있는지에 대해서 의식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폭싹 속았수다〉 같이 1940년대 후반 제주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4.3 사건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없었던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봐요.

임현영
비슷한 얘기를 저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라는 서동진 선생님 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어떤 시대를 재현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에 있어 ‘스타일화’라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거든요. 매스미디어에서 생산되는 이미지들이 소위 유행이라고 불리는 기억에 용이한 미학적 양식을 제공한다는거죠. 〈응답하라 시리즈〉의 팬으로서 읽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던 글인데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노스탤지어에 기대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의 방식이 틀렸다, 시대착오를 극복해야한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으로서, 저의 입장과는 상이한 관점이고 입장일 수는 있어도.

황지원
역설적으로 삶이 너무나 힘드니까 과거를 낭만화시켜서라도 좋은 추억만 되새기면 된다는 입장... 이해는 할 수 있죠. 무언가라도 붙잡을 수 밖에 없는 심정을요.

장영해
그런데 콘텐츠를 비판하는 것과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에 대한 비판은 다른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후자가 전자에 속할 수밖에 없는데. 콘텐츠 자체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계속 이루어져야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얻는 효과에 대해서도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현영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갈까해요. 앞으로 읽고 싶은 텍스트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요즘에 관심을 두고 계신 분야라든지요. 무빙 이미지와 관련해서 돌아가면서 하나씩 얘기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장영해
저는 정치 경제 뉴스만 많이 보는데요. 극우화가 심각한 수준이고 세계 대전 직전에 편가르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국수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치는 뉴스를 보다가 하루가 다 가는 것 같거든요. 파시즘적인 사고가 팽배한 것 같고 그 국수주의적인 정책들을 실제로 시행하고 있고…. 아까 지원 샘이 요즘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두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영화관 안에서 핸드폰을 보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하셨잖아요. 사람들이 자신한테 익숙한 미디어로 치환되기 마련인데, 개인화와 파편화를 초래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이 국수주의적인 경향과 밀접한 인과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이 답답해질 때마다 자꾸 고전 영화를 보게 되는 것 같은데요. 전쟁이나 혁명기의 문학이 가진 특유의 혼란스럽고 정신이상적인 성향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통용되었던 것처럼, 동시대를 살면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돼요. 그때마다 고전 영화로 돌아가는거죠.

황지원
감독이나 작가가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해석이 더해지고 그게 이미지에 담기잖아요. 나아가 그 이미지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연구자 혹은 비평가의 글을 읽고 싶어요. , 에이드리언 마틴(Adrian Martin)이 영화의 리듬과 제스처를 포착하는 방식, 레이몽 벨루(Raymond Bellour)가 이미지를 텍스트처럼 정밀하게 분석하는 방식, 조나단 로젠바움(Jonathan Rosenbaum)과 세르주 다네(Serge Daney)가 이미지를 윤리적·정치적 차원에서 사유하는 방식은 각각 비평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또한 알렌타 주판치치(Alenka Zupančič)의 작업은 이미지와 주체, 욕망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날카롭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자극이 되구요. 그 다음으로는 계속 해오던 것처럼 무빙 이미지 큐레이션 혹은 큐레이팅에 관한 글들을 읽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이어온 관심처럼 무빙 이미지의 큐레이션, 특히 전시와 상영 사이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다루는 글들도 계속 읽고자 합니다. 발솜이 썼던 「전시장 안의 영화, 폐허 속의 영화 A cinema in the gallery, a cinema in ruins」라는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해요. 스터디에서 유난히 발솜의 글을 많이 읽었는데, 이 기회에 더 깊게 파고들어도 좋겠다 싶어요. 마지막으로 저는 어떤 현상, 대상, 개념이 등장하게 된 계보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요즘 들어 고전의 중요성을 크게 인지하게 되었거든요. 스벤 뤼티켄(Sven Lütticken)과 조나단 벨러(Jonathan Beller)의 작업은 이 점에서 특히 중요한 참조가 되는 것 같은데, 뤼티켄이 자본의 이미지화 과정을 역사적 계보 속에서 추적한다면, 벨러의 ‘cinematic mode of production’ 개념은 영화적 지각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구조적으로 연동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이론적 축적 위에서 동시대의 이미지를 바라볼 때, 현재의 영상이 어떤 조건 속에서 구성되는지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희
저의 경우에는 아까 영해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공감이 많이 되었는데요. 시차를 두고 얻을 수 있는 통찰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고, 그렇게 봤을 때 가장 잘 보이게 되는 것들 중 하나가 구조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다루는 매체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인식 체계와 사회 구조를 사유하는 작업들을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또, 매체에 타고난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제약 때문에 지니게 되는 특수한 미학적 가치가 있는 것처럼, 현실이라는 장에 묶여 있지만 그로 인해 더 적극적으로 발휘되는 사변적 역량도 있기 때문에 이를 보여주는 다큐픽션 장르를 더 연구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읽고 싶은 텍스트는... 지금 읽고 있는 『절대자의 지도제작 Cartographies of the Absolute』을 잘 읽고 있기 때문에 우선 끝나고 생각해 보는 것으로요.

임현영
저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이렇게 얘기하면 모든 영화를 포괄하는 것이 되겠지만, 아무튼 상반된 두 영역에 관련된 글을 동시에 읽어보고 싶어요.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는 현실의 가공되지 않은 측면, 그리고 현실의 모순점을 파고들어서 밝혀내는 성격이 강하고, 영화의 시초부터 있었던 리얼리즘 미학의 계보를 잇는다는 면에서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시간(성)이나 서사를 놓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숏폼이나 지각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에 이야기 혹은 서사가 다시 주요해질 수 있을까하는 게 저의 질문이고, 서사에 대한 몰두가 단지 시대착오적인 집착에 불과할까하는 의심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데요. 아까 이야기했던 노스탤지어의 측면과도 연결이 될텐데, 저는 모든 현상이 약간의 시간차를 가지고 하나가 하나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다고 봐요. 제가 쓰는 글이나, 논문이나, 관심을 가진 작품들이 다 이런 시차와 관련되어 있거나 시차를 담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잔여적인 여파에 힘입어서 다시 부상하거나 의미를 얻는 현상에 이유모를 흥미를 느껴요. 이에 기반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현실에 없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감독이 상상하는 세계를 매개하는 게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러한 영화들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들보다 결코 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읽고 싶은 텍스트도 허구의 시간과 역사적인 시간이 합쳐져서 만드는 시간성에 대한 텍스트. 요즘 다시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Time and Narrative』를 읽고 있기도 하고요. 미술도 매체도 중요하지만, 어떨 때 보면 저는 그냥 ‘시간’ 자체에 대한 논의에 굉장히 목말라 있는 것 같아요. 끝?

황지원
끝!

장영해
끝!

모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