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O EXTRAVAGANZA 화산의 대향연
번역 장영해
시칠리아 북쪽에 위치한 에올리 제도 중 하나인 스트롬볼리(Stromboli)는 활화산의 원뿔로 이루어진 섬이다. 이곳은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의 네오리얼리즘 멜로드라마 <스트롬볼리 Stromboli>(1950)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나는 2012년 피오루치 미술 재단(Fiorucci Art Trust)에서 밀로반 파로나토(Milovan Farronato)와 닉 마우스(Nick Mauss)가 기획한 전시 《화산의 대향연 Volcano Extravaganza》(2012)에서 진행된 동일 제목의 강연-퍼포먼스를, 바다 옆 현무암 바위에 앉아 화산을 마주한 채로 수행했다. 이 텍스트는 그 강연의 편집된 원고다. 밤하늘 위로 화산재가 간헐적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강연의 목표는 화산의 이미지를 화산에 되돌려주는 것이었으며, 원래 촬영이 진행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로셀리니의 영화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프란체스코 베촐리(Francesco Vezzoli)의 영화 설치 <인간 목소리의 종말 La fine della voce umana>(2001)에 대한 짧은 텍스트도 수정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내가 2004년에서 2005년 필라델피아의 패브릭 워크숍 앤 뮤지엄(Fabric Workshop and Museum)에서 기획한 전시 《진실에 관한 실험 Experiments with Truth》(2004-2005)에 포함시킨 바 있다. 나는 일련의 간접적인 수법을 통해 섬이라는 주제와 연결될 수 있었고, 이러한 즉물주의적 시나리오는 현실(reality)과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노는 데 매우 유용했다. 스트롬볼리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진실에 관한 실험’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책 『자서전: 진실에 관한 나의 실험 이야기 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1925–1929)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 전시는 다큐멘터리와 예술가들의 무빙 이미지 실천에 관한 개념들을 탐구하며 동시대 미술에서의 ‘다큐멘터리적 전환(documentary turn)’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던 2002년 《도쿠멘타11Documenta11》의 작업을 계승하고자 기획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기획한 전시 《진실에 관한 실험》(2004-2005)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확장된 고찰이었다. 내가 소개한 예술가들 중 콜렉티브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를 제외하면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document)’ 영상이나 사진을 사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거기 있는(there)’ 것을 기록한다는 발상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이 전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예술적으로 변형하는 과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은 우리가 함께 작업한 영화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흰 가면 Frantz Fanon: Black Skin, White Mask>(1996)을 두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설치작품 <파농 SA Fanon SA>(1997)로 재구성했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흰 가면>(1996)은 프란츠 파농의 삶—정신과 의사이자 혁명가로서의 삶—을 미학적으로 구성한 서사를 제시한다. 《진실에 관한 실험》(2004-2005)에서 상영된 설치작품 <파농 SA>(1997)는 이로부터 추상화된 형태를 취한다. 전자는 여러 겹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알제리 전쟁의 다큐멘터리 푸티지, 영화 <알제리 전투 Algerian War>(1966)에서 가져온 알제리 전쟁 당시 사건들의 허구적 재구성, 파농을 알고 함께 일했던 목격자들의 인터뷰가 포함되며, 이 모든 요소는 영화의 리서치 및 사전 제작 과정에서 찍은 정지 이미지들로 인해 중단되기도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전시에 참여한 모든 예술가들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가리키면서도 그 재현 방식을 새롭게 구성하는 다층적이고 참조적인 미학에 몰두하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 영화에서 등장한 네오리얼리즘 미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프랑스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같은 인물들은 네오리얼리즘이 현실 그 자체를 화면에 보다 잘 드러내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어떤 이들은 이것이 관념론적 입장이라고 반박하며, 네오리얼리즘과 관련된 여러 영화 제작자들(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초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화들—은 매우 다른 스타일을 지녔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파시즘 시대를 갈무리하며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현실(reality)’을 제시하려는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이 영화들은 매우 구성적이었다. 특히 로셀리니의 경력을 추적해보면 그는 이탈리아에서 지속되는 계급 투쟁만큼이나 윤리적·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네오리얼리즘 영화 제작의 이데올로기와 오늘날 ‘다큐멘터리적 전환’에 속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입장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동시대 작업들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려 하는 반면, 네오리얼리스트들은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제 막 부상하던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의 영화들을 그보다 훨씬 느슨한 범주의 동시대적 국제 예술 작품들과 비교하고 있다. 네오리얼리즘 운동의 강점은 그것이 정치적 전환의 흐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데 있다. 예컨대 당시 인도의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의 지지를 통해 사탸지트 레이(Satyajit Ray)의 영화는 전후 인도의 내셔널 시네마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동시대 미술에서의 ‘다큐멘터리 전환’은 1989년 이후, 즉 ‘실재하던 사회주의’가 종언을 맞이한 이후의 현상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소개했던 많은 작업들은, 진보적 사회 변혁이 가능해보였던 이전 시대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은 프란체스코 베촐리(Francesco Vezzoli)의 2채널 영상 설치 작업으로, 작가는 이 작품에서 로셀리니(Rossellini)의 1948년 단편영화 <인간의 목소리 Una voce umana>(1948)의 마지막 장면을 재연한다. 로셀리니의 영화에서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안나 마냐니(Anna Magnani)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전화로 다시 그와 연결되기 위해 절박하게 애쓰는 인물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장 콕토(Jean Cocteau)의 희곡 《인간의 목소리 La voix humaine》(1930)를 원작으로 하며, 이 연극은 1930년에 초연되었다. 배우의 목소리에 집중한 콕토의 방식은 서사나 연출적 제약에 덜 얽매이면서도 배우의 연기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이 작품은 콕토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모방된 작업이 되었고, 베촐리의 작업은 이를 따라간 수많은 재현 중 하나일 뿐이었다. 프란시스 풀랑(Francis Poulenc)의 1958년 오페라와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이 주연한 1966년 버전의 연극—그녀는 로셀리니의 영화 Stromboli (1950)에 출연한 지 17년 후였다—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1
베촐리의 작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설치되어 왔다. 2001년 카스텔로 디 리볼리(Castello di Rivoli)에서처럼 상호소통(intercommunicate)하는 두 개의 방에 설치되기도 했고, 《진실에 관한 실험》(2004-2005) 전시처럼 하나의 스크린에 두 개의 이미지를 병렬 투사하여 더욱 영화적인 공명을 주는 형식으로도 상영되었다. 전자의 설치 방식은 두 액션이 발생하는 다른 장소들이 서로를 거울처럼 반영하게 하는데, 한쪽 스크린은 콕토의 연극을 베촐리가 재연한 장면을, 다른 쪽은 영화적 버전을 참조한다. 베촐리의 작업은 시네필리아(cinephilia)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에서 그는 상징적인 배우들(안나 마냐니, 잉그리드 버그만, 비앙카 재거)과 감독들(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콕토)을 중심으로 현기증날 정도로 복잡한 연상과 참조의 그물을 구축하며, 이 복잡성 속에서 비평가와 관람자는 쉽게 길을 잃는다. (이러한 연상 구조는 그가 다음 해인 2002년에 제작한 금속 자수를 놓은 일련의 레이저 프린트 시리즈에서도 탐구되었다.)2 한쪽 스크린에서는 비앙카 재거가 안나 마냐니가 맡았던 역할을 재연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네필리아적 발굴(cinephilic excavation)로서 베촐리가 스스로를 전화기 너머 재거/마냐니의 가상 연인으로 묘사한다. 그는 눈꺼풀 위에 떠 있는 눈의 이미지를 붙여, 콕토의 영화 <오르페의 유언 Le testament d’Orphée>(1960)에서 사용된 유사한 장치를 모방한다.3
2004년 베촐리의 전시 《죽음의 삼부작 Trilogia della Morte》(2004)이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에서 열렸을 당시, 미술사학자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여기서 베촐리는 자신의 작업에 또 다른 영감을 준 작품으로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영화 <루페 Lupe>(1965)를 언급한다. 이 영화에서 에디 세드윅(Edie Sedgwick)은 1944년에 자살한 라틴계 할리우드 배우 루페 벨레즈(Lupe Vélez)를 연기한다.4 <루페>(1965)는 싱글 스크린과 더블 스크린 두 가지 버전으로 상영되었으며, 베촐리는 자신의 2채널 영상 설치 작업에서 이 형식을 반영하기로 결정했다.5 같은 인터뷰에서 베촐리는 로셀리니가 워홀이 자신을 모방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는 아마도 워홀이 더블 침대를 연극 무대처럼 사용하는 로셀리니의 장치나 그의 네오리얼리즘적 카메라 스타일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추측일 것이다.
로셀리니의 <인간의 목소리>(1948)는 마냐니가 주연을 맡은 또 다른 영화 <기적 Il Miracolo>(1948)을 포함한 2부작 옴니버스 영화인 <사랑 L’Amore>(1948)의 일부로 개봉되었다.6 <사랑>(1948)은 1950년 미국에서 <사랑의 방식들 Ways of Love>(1950)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New York Film Critics Circle)에서 1950년 최고의 외국어 영화로 선정되었지만, <기적>(1948)의 한 부분에서 성모 마리아의 재현에 대해 종교적 이의를 제기받아 뉴욕 주에서 검열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관한 소송으로 이어졌고,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가 영화의 표현이 헌법적으로 보호받는 표현의 한 형태임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7 대법원 판결 당시 당시 34세였던 워홀이 이 영화를 봤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영화란 욕망, 열정, 결핍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를 접할 때, 관객은 배우들에게 자신의 ‘전시성(exhibitionism)’을 기꺼이 빌려준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베촐리는 스타나 유명인, 혹은 배우와 관객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음으로써 이 과정을 방해한다. 그는 카메라 뒤에 머무는 대신, 스타 혹은 스타의 애정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스스로를 배치한다. 이로써 그는, 예를 들어 헬무트 버거(Helmut Berger)와 키스하기를 바랬을 법한 수많은 영화 관객들이 품었을 법한 판타지를 대리하는 위치를 점유한다. 헬무트 버거는 유럽 아트 시네마의 주역이었으며, 특히 그의 파트너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작품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프란체스코 베촐리의 작품 <입맞춤 (다이너스티 놀이를 합시다) The Kiss (let’s play Dynasty!)>(2000)에서는, 베촐리가 한 시즌(1982-1983) 동안 인기 멜로드라마 <다이너스티 Dynasty>(1981-1989)에 출연했던 헬무트 버거의 자리를 대신한다. 여기서 베촐리는 공연이 끝난 후 백스테이지까지 들어가는 특권을 지닌 궁극의 팬(fan)이다. 그는 첼란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작업은 비스콘티 영화를 보며 고풍스러운 가구에 매료되고, 자신의 고독과 고통을 숭고한 집착으로 바꾸는, 시골 출신 게이(provincial fag)의 나약함에 대한 연구이다.’8
동시에, 이러한 전시적(exhibitionistic) 연출 방식—거의 모든 영화에서 핵심 역할로 스스로를 삽입하는 방식—은 심리적 역학을 형성한다. 관객의 욕망의 장면에 스스로를 끼워 넣음으로써, 그들이 스타나 유명인을 향해 갖는 욕망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는 감독이자 배우로서 주체(subject)이면서도, 퍼포머와 관객의 욕망 대상(object)이 된다.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전통적인 영화 형식이 우리의 욕망을 재현하는 데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개입한다.
나는 베촐리의 초기 작업이 꽤 급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큐레이터로 참여한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베촐리는 패션 모델이자 예술가였던 베루슈카(Veruschka)를 주인공으로, 액자에 담긴 일련의 자수 시리즈를 발표했다. 전시 개막일에는 베촐리가 베루슈카와 함께 라이브 퍼포먼스를 펼치며 그녀가 직접 수를 놓게 했다.9 이 작업은 개념적 차별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주류 산업의 제작 수준(mainstream production values)에 대한 야망도 드러냈다. 당시 그가 사용했던 영상 기술의 제약 때문에, 실상 그의 작업은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영화적 스펙터클 체계의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제작의 질이 대폭 향상된 최근 작업은 오히려 유명인과 스펙터클의 세계를 냉소적 평범함(cynical banality) 속에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이전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흥미로운 논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베촐리가 피에르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의 1964년 다큐멘터리 <사랑의 집회 Comizi d’amore>(1964)를 2004년 리얼리티 TV 스타일로 재구성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집회 Comizi di Non Amore>(2004)다. 이 작업은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파졸리니의 다큐멘터리는 섹스에 관한 이탈리아 국민들의 관점을 탐구한 작품으로, 그들은 텔레비전 인터뷰 경험이 전부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베촐리의 버전은 그와 대조적으로 자기 재현(self-representation)에 대해 완벽히 인식하고 있는 세대를 위한 것이다.10
하지만 이제 베촐리의 작품을 통해 다시 로셀리니의 작품으로 되돌아가보자. 로셀리니와 마냐니는 1945년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 작업 중 사랑에 빠졌다. 몇 년 후, 로셀리니는 마냐니에게 <스트롬볼리 Stromboli>(1950)라는 새로운 영화의 주연을 약속하며, ‘그 영화가 너의 경력을 완전히 바꿔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렵, 로셀리니는 헐리우드 스타였던 잉그리드 버그먼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당시 그녀는 데이비드 O. 셀즈닉(David O. Selznick)과의 7년 계약이 막 끝난 참이었다. 결과적으로 로셀리니는 <스트롬볼리>(1950)를 버그먼에게 주었고, 이는 곧 마냐니와의 관계의 끝을 의미했다. 마냐니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인근 섬인 불카노(Vulcano)에서 <스트롬볼리>(1950)와 거의 동시에 제작된 경쟁작 <화산 Vulcano>(1950)의 주연을 맡았다!11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에는 영화적인 것(cinematic)과 참조적인 것(referential)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내가 베촐리의 이후 작업들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덧쓰기(palimpsest) 미학의 전개 방식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미학은 관객이 여러 층위의 참조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그 작업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영화적 경험인 동시에, 그만큼이나 그 이면에 깔린 참조물들에 관한 것으로도 작동하게 된다. 만약 목적이 참조를 인식하는 것이라면, 그 지점에서 영화 자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나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같은 몇몇 예술가들이 취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지워내고자 하는 욕망, 즉 예술가와 대중 모두의 상상력을 사로잡아온 이 예술 형식에 대한 일종의 복수를 실행하려는 욕구를 보인다. 반면 베촐리는 점점 더 영화 시스템 내부에서 작업을 제작하려고 하며, 이는 그가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극소수의 예술가들만이 영화 제작자들이 누리는 제작 예산을 다룰 수 있다. 로셀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투쟁기를 거쳐 성장한 세대의 영화인이었고, 국내와 국외를 망라하는 영화 제작 시스템 속에서 작업했다. 안토니오니는 인물과 서사를 삭제하는 모더니스트였다. 그의 영화에서는 인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일식 L’Eclisse>(1962)에서의 모니카 비티(Monica Vitti), <모험 L’Avventura>(1960)에서의 레아 마사리(Lea Massari)처럼. 그는 이야기보다 형식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렇다면 로셀리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모더니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가 다큐멘터리와 서사를 좌파의 것으로 탈환하려했다는 것에서, 다음으로 그뿐만이 아니라 대중적 역사와 기억과 맞닿아 있는 형식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는 측면에서다. <이탈리아 만세! Viva l’Italia!>(1961)나 <루이 14세의 권력 장악 La prise de pouvoir par Louis XIV>(1966)과 같은 작품을 보라. 그에게 있어 네오리얼리즘적 충동은 결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만세!>(1961)의 전투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판 시노르(Pan Cinor) 줌렌즈 같은 특별한 렌즈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반면, 베촐리는 보다 탈근대(post-modern)적인 예술가다. 베촐리에게서 로셀리니와 그의 세대가 실현하려 했던 사회적,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은 더 이상 적절하거나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내 글쓰기의 주요한 관심사는 관객의 전적인 몰입과 집중을 요구하며 하나의 헌신적이고 몰입적인 공간 속에서 기능하는 영화 세계(로셀리니의 것과 같은)와, 베촐리의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에서처럼 보다 유연하고 다층적인 연상망을 제공하는 미술 세계 사이의 갈등이다.
원본 도서 Curating the moving Image
by Mark Nash
MIT Press
2023
‘진실에 관한 실험’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책 『자서전: 진실에 관한 나의 실험 이야기 An Autobiography: The Story of My Experiments With Truth』(1925–1929)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 전시는 다큐멘터리와 예술가들의 무빙 이미지 실천에 관한 개념들을 탐구하며 동시대 미술에서의 ‘다큐멘터리적 전환(documentary turn)’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던 2002년 《도쿠멘타11Documenta11》의 작업을 계승하고자 기획되었다. 필라델피아에서 기획한 전시 《진실에 관한 실험》(2004-2005)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확장된 고찰이었다. 내가 소개한 예술가들 중 콜렉티브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를 제외하면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document)’ 영상이나 사진을 사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거기 있는(there)’ 것을 기록한다는 발상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이 전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예술적으로 변형하는 과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은 우리가 함께 작업한 영화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흰 가면 Frantz Fanon: Black Skin, White Mask>(1996)을 두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설치작품 <파농 SA Fanon SA>(1997)로 재구성했다.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흰 가면>(1996)은 프란츠 파농의 삶—정신과 의사이자 혁명가로서의 삶—을 미학적으로 구성한 서사를 제시한다. 《진실에 관한 실험》(2004-2005)에서 상영된 설치작품 <파농 SA>(1997)는 이로부터 추상화된 형태를 취한다. 전자는 여러 겹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알제리 전쟁의 다큐멘터리 푸티지, 영화 <알제리 전투 Algerian War>(1966)에서 가져온 알제리 전쟁 당시 사건들의 허구적 재구성, 파농을 알고 함께 일했던 목격자들의 인터뷰가 포함되며, 이 모든 요소는 영화의 리서치 및 사전 제작 과정에서 찍은 정지 이미지들로 인해 중단되기도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전시에 참여한 모든 예술가들은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가리키면서도 그 재현 방식을 새롭게 구성하는 다층적이고 참조적인 미학에 몰두하고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 영화에서 등장한 네오리얼리즘 미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프랑스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과 같은 인물들은 네오리얼리즘이 현실 그 자체를 화면에 보다 잘 드러내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어떤 이들은 이것이 관념론적 입장이라고 반박하며, 네오리얼리즘과 관련된 여러 영화 제작자들(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초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화들—은 매우 다른 스타일을 지녔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파시즘 시대를 갈무리하며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현실(reality)’을 제시하려는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이 영화들은 매우 구성적이었다. 특히 로셀리니의 경력을 추적해보면 그는 이탈리아에서 지속되는 계급 투쟁만큼이나 윤리적·철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네오리얼리즘 영화 제작의 이데올로기와 오늘날 ‘다큐멘터리적 전환’에 속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입장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동시대 작업들이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려 하는 반면, 네오리얼리스트들은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제 막 부상하던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의 영화들을 그보다 훨씬 느슨한 범주의 동시대적 국제 예술 작품들과 비교하고 있다. 네오리얼리즘 운동의 강점은 그것이 정치적 전환의 흐름들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데 있다. 예컨대 당시 인도의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의 지지를 통해 사탸지트 레이(Satyajit Ray)의 영화는 전후 인도의 내셔널 시네마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동시대 미술에서의 ‘다큐멘터리 전환’은 1989년 이후, 즉 ‘실재하던 사회주의’가 종언을 맞이한 이후의 현상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필라델피아에서 소개했던 많은 작업들은, 진보적 사회 변혁이 가능해보였던 이전 시대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은 프란체스코 베촐리(Francesco Vezzoli)의 2채널 영상 설치 작업으로, 작가는 이 작품에서 로셀리니(Rossellini)의 1948년 단편영화 <인간의 목소리 Una voce umana>(1948)의 마지막 장면을 재연한다. 로셀리니의 영화에서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안나 마냐니(Anna Magnani)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전화로 다시 그와 연결되기 위해 절박하게 애쓰는 인물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장 콕토(Jean Cocteau)의 희곡 《인간의 목소리 La voix humaine》(1930)를 원작으로 하며, 이 연극은 1930년에 초연되었다. 배우의 목소리에 집중한 콕토의 방식은 서사나 연출적 제약에 덜 얽매이면서도 배우의 연기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이 작품은 콕토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모방된 작업이 되었고, 베촐리의 작업은 이를 따라간 수많은 재현 중 하나일 뿐이었다. 프란시스 풀랑(Francis Poulenc)의 1958년 오페라와 잉그리드 버그먼(Ingrid Bergman)이 주연한 1966년 버전의 연극—그녀는 로셀리니의 영화 Stromboli (1950)에 출연한 지 17년 후였다—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1
베촐리의 작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설치되어 왔다. 2001년 카스텔로 디 리볼리(Castello di Rivoli)에서처럼 상호소통(intercommunicate)하는 두 개의 방에 설치되기도 했고, 《진실에 관한 실험》(2004-2005) 전시처럼 하나의 스크린에 두 개의 이미지를 병렬 투사하여 더욱 영화적인 공명을 주는 형식으로도 상영되었다. 전자의 설치 방식은 두 액션이 발생하는 다른 장소들이 서로를 거울처럼 반영하게 하는데, 한쪽 스크린은 콕토의 연극을 베촐리가 재연한 장면을, 다른 쪽은 영화적 버전을 참조한다. 베촐리의 작업은 시네필리아(cinephilia)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에서 그는 상징적인 배우들(안나 마냐니, 잉그리드 버그만, 비앙카 재거)과 감독들(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콕토)을 중심으로 현기증날 정도로 복잡한 연상과 참조의 그물을 구축하며, 이 복잡성 속에서 비평가와 관람자는 쉽게 길을 잃는다. (이러한 연상 구조는 그가 다음 해인 2002년에 제작한 금속 자수를 놓은 일련의 레이저 프린트 시리즈에서도 탐구되었다.)2 한쪽 스크린에서는 비앙카 재거가 안나 마냐니가 맡았던 역할을 재연하고, 다른 쪽에서는 시네필리아적 발굴(cinephilic excavation)로서 베촐리가 스스로를 전화기 너머 재거/마냐니의 가상 연인으로 묘사한다. 그는 눈꺼풀 위에 떠 있는 눈의 이미지를 붙여, 콕토의 영화 <오르페의 유언 Le testament d’Orphée>(1960)에서 사용된 유사한 장치를 모방한다.3
2004년 베촐리의 전시 《죽음의 삼부작 Trilogia della Morte》(2004)이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에서 열렸을 당시, 미술사학자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여기서 베촐리는 자신의 작업에 또 다른 영감을 준 작품으로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영화 <루페 Lupe>(1965)를 언급한다. 이 영화에서 에디 세드윅(Edie Sedgwick)은 1944년에 자살한 라틴계 할리우드 배우 루페 벨레즈(Lupe Vélez)를 연기한다.4 <루페>(1965)는 싱글 스크린과 더블 스크린 두 가지 버전으로 상영되었으며, 베촐리는 자신의 2채널 영상 설치 작업에서 이 형식을 반영하기로 결정했다.5 같은 인터뷰에서 베촐리는 로셀리니가 워홀이 자신을 모방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이는 아마도 워홀이 더블 침대를 연극 무대처럼 사용하는 로셀리니의 장치나 그의 네오리얼리즘적 카메라 스타일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추측일 것이다.
로셀리니의 <인간의 목소리>(1948)는 마냐니가 주연을 맡은 또 다른 영화 <기적 Il Miracolo>(1948)을 포함한 2부작 옴니버스 영화인 <사랑 L’Amore>(1948)의 일부로 개봉되었다.6 <사랑>(1948)은 1950년 미국에서 <사랑의 방식들 Ways of Love>(1950)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New York Film Critics Circle)에서 1950년 최고의 외국어 영화로 선정되었지만, <기적>(1948)의 한 부분에서 성모 마리아의 재현에 대해 종교적 이의를 제기받아 뉴욕 주에서 검열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관한 소송으로 이어졌고,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가 영화의 표현이 헌법적으로 보호받는 표현의 한 형태임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7 대법원 판결 당시 당시 34세였던 워홀이 이 영화를 봤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영화란 욕망, 열정, 결핍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를 접할 때, 관객은 배우들에게 자신의 ‘전시성(exhibitionism)’을 기꺼이 빌려준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베촐리는 스타나 유명인, 혹은 배우와 관객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음으로써 이 과정을 방해한다. 그는 카메라 뒤에 머무는 대신, 스타 혹은 스타의 애정의 대상이 되는 위치에 스스로를 배치한다. 이로써 그는, 예를 들어 헬무트 버거(Helmut Berger)와 키스하기를 바랬을 법한 수많은 영화 관객들이 품었을 법한 판타지를 대리하는 위치를 점유한다. 헬무트 버거는 유럽 아트 시네마의 주역이었으며, 특히 그의 파트너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의 작품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프란체스코 베촐리의 작품 <입맞춤 (다이너스티 놀이를 합시다) The Kiss (let’s play Dynasty!)>(2000)에서는, 베촐리가 한 시즌(1982-1983) 동안 인기 멜로드라마 <다이너스티 Dynasty>(1981-1989)에 출연했던 헬무트 버거의 자리를 대신한다. 여기서 베촐리는 공연이 끝난 후 백스테이지까지 들어가는 특권을 지닌 궁극의 팬(fan)이다. 그는 첼란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작업은 비스콘티 영화를 보며 고풍스러운 가구에 매료되고, 자신의 고독과 고통을 숭고한 집착으로 바꾸는, 시골 출신 게이(provincial fag)의 나약함에 대한 연구이다.’8
동시에, 이러한 전시적(exhibitionistic) 연출 방식—거의 모든 영화에서 핵심 역할로 스스로를 삽입하는 방식—은 심리적 역학을 형성한다. 관객의 욕망의 장면에 스스로를 끼워 넣음으로써, 그들이 스타나 유명인을 향해 갖는 욕망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는 감독이자 배우로서 주체(subject)이면서도, 퍼포머와 관객의 욕망 대상(object)이 된다.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전통적인 영화 형식이 우리의 욕망을 재현하는 데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개입한다.
나는 베촐리의 초기 작업이 꽤 급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큐레이터로 참여한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베촐리는 패션 모델이자 예술가였던 베루슈카(Veruschka)를 주인공으로, 액자에 담긴 일련의 자수 시리즈를 발표했다. 전시 개막일에는 베촐리가 베루슈카와 함께 라이브 퍼포먼스를 펼치며 그녀가 직접 수를 놓게 했다.9 이 작업은 개념적 차별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주류 산업의 제작 수준(mainstream production values)에 대한 야망도 드러냈다. 당시 그가 사용했던 영상 기술의 제약 때문에, 실상 그의 작업은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영화적 스펙터클 체계의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제작의 질이 대폭 향상된 최근 작업은 오히려 유명인과 스펙터클의 세계를 냉소적 평범함(cynical banality) 속에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나는 이것이 이전만큼 흥미롭지는 않다.
흥미로운 논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베촐리가 피에르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의 1964년 다큐멘터리 <사랑의 집회 Comizi d’amore>(1964)를 2004년 리얼리티 TV 스타일로 재구성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집회 Comizi di Non Amore>(2004)다. 이 작업은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파졸리니의 다큐멘터리는 섹스에 관한 이탈리아 국민들의 관점을 탐구한 작품으로, 그들은 텔레비전 인터뷰 경험이 전부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베촐리의 버전은 그와 대조적으로 자기 재현(self-representation)에 대해 완벽히 인식하고 있는 세대를 위한 것이다.10
하지만 이제 베촐리의 작품을 통해 다시 로셀리니의 작품으로 되돌아가보자. 로셀리니와 마냐니는 1945년 <무방비 도시 Roma città aperta>(1945) 작업 중 사랑에 빠졌다. 몇 년 후, 로셀리니는 마냐니에게 <스트롬볼리 Stromboli>(1950)라는 새로운 영화의 주연을 약속하며, ‘그 영화가 너의 경력을 완전히 바꿔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렵, 로셀리니는 헐리우드 스타였던 잉그리드 버그먼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당시 그녀는 데이비드 O. 셀즈닉(David O. Selznick)과의 7년 계약이 막 끝난 참이었다. 결과적으로 로셀리니는 <스트롬볼리>(1950)를 버그먼에게 주었고, 이는 곧 마냐니와의 관계의 끝을 의미했다. 마냐니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인근 섬인 불카노(Vulcano)에서 <스트롬볼리>(1950)와 거의 동시에 제작된 경쟁작 <화산 Vulcano>(1950)의 주연을 맡았다!11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에는 영화적인 것(cinematic)과 참조적인 것(referential)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내가 베촐리의 이후 작업들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덧쓰기(palimpsest) 미학의 전개 방식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미학은 관객이 여러 층위의 참조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그 작업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영화적 경험인 동시에, 그만큼이나 그 이면에 깔린 참조물들에 관한 것으로도 작동하게 된다. 만약 목적이 참조를 인식하는 것이라면, 그 지점에서 영화 자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나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같은 몇몇 예술가들이 취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지워내고자 하는 욕망, 즉 예술가와 대중 모두의 상상력을 사로잡아온 이 예술 형식에 대한 일종의 복수를 실행하려는 욕구를 보인다. 반면 베촐리는 점점 더 영화 시스템 내부에서 작업을 제작하려고 하며, 이는 그가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극소수의 예술가들만이 영화 제작자들이 누리는 제작 예산을 다룰 수 있다. 로셀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투쟁기를 거쳐 성장한 세대의 영화인이었고, 국내와 국외를 망라하는 영화 제작 시스템 속에서 작업했다. 안토니오니는 인물과 서사를 삭제하는 모더니스트였다. 그의 영화에서는 인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일식 L’Eclisse>(1962)에서의 모니카 비티(Monica Vitti), <모험 L’Avventura>(1960)에서의 레아 마사리(Lea Massari)처럼. 그는 이야기보다 형식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렇다면 로셀리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모더니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가 다큐멘터리와 서사를 좌파의 것으로 탈환하려했다는 것에서, 다음으로 그뿐만이 아니라 대중적 역사와 기억과 맞닿아 있는 형식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는 측면에서다. <이탈리아 만세! Viva l’Italia!>(1961)나 <루이 14세의 권력 장악 La prise de pouvoir par Louis XIV>(1966)과 같은 작품을 보라. 그에게 있어 네오리얼리즘적 충동은 결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만세!>(1961)의 전투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판 시노르(Pan Cinor) 줌렌즈 같은 특별한 렌즈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반면, 베촐리는 보다 탈근대(post-modern)적인 예술가다. 베촐리에게서 로셀리니와 그의 세대가 실현하려 했던 사회적,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은 더 이상 적절하거나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내 글쓰기의 주요한 관심사는 관객의 전적인 몰입과 집중을 요구하며 하나의 헌신적이고 몰입적인 공간 속에서 기능하는 영화 세계(로셀리니의 것과 같은)와, 베촐리의 <인간 목소리의 종말>(2001)에서처럼 보다 유연하고 다층적인 연상망을 제공하는 미술 세계 사이의 갈등이다.
원본 도서 Curating the moving Image
by Mark Nash
MIT Press
2023